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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쿠바의 휴양지, 바라데로

by 김민식pd 2023. 5. 17.

쿠바의 마지막 여행지, 바라데로에 갔습니다.

아바나에서 가깝고, 국제 공항이 있어 해외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도시입니다.

길고 긴 해변이 있어요.

물가가 저렴해 남미나 유럽에서 온 휴양객들의 낙원.

한국에서 가기엔 멀고 또 항공권이 너무 비싸 동남아와 비교했을 때 가성비가 떨어집니다. 음식도 우리 입에 잘 맞지 않고요. 영어로 소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스페인어를 읽는 방법 하나.

단어의 끝에 오는 dad를 ty로 바꿔 읽는 겁니다.

realidad = reality = 현실

문득 지난번 방문한 도시, 트리니다드가 떠올랐어요.

trinidad = trinity = 삼위일체

트리니티는 영화 <매트릭스>의 여주인공이지요. 그 영화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은유로 가득한데요. '네오'는 새롭게 나타난 인류, 구세주를 뜻하고요. 

자 그럼 이건 무슨 뜻일까요?

어미 do를 cy로 바꾸면 됩니다.

legado = legacy = 유산

해변에는 인근 호텔 이용객을 위한 썬베드가 있어요. 저는 저렴한 까사에서 묵고 있기에 해당사항이 없는데요. 직원에게 물어보니 대여료를 내면 쓸 수 있다고요. 얼마야? 100페소, 천원? 진짜 싸네요. 

휴대폰에서 전자책을 불러와 읽습니다.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면책특권. 20대에 영어 원서로 읽었을 때는 제목이 <No come back>이었어요. 나만의 길티 플레저입니다. 여행가서 심심할 때마다 다시 읽는 단편집. 특히 <황제>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바다로 휴가를 떠난 런던의 은행가가 황제라 불리는 큰 물고기를 낚은 후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인데요. <노인과 바다>에 대한 오마주 같아요. 비슷한 전개지만, 결말은 많이 다릅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 1990년대 제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스릴러 작가입니다. 

점심 먹으러 가서 피자를 시킵니다. 우리 돈 8400원인데요. 엄청나게 큰 피자가 나왔어요. 2~3인분은 족히 될 것 같네요. 옆 테이블 가족이 놀라서 쳐다봅니다. '저걸 혼자 먹어?' 나도 이렇게 클줄 몰랐다고요. 갑자기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 제목이 떠오릅니다. '오늘 밤엔 굶고 자야지.' 결국 다 먹지 못해 남은 걸 포장해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곳엔 일회용 포장용품이 없거든요. 결국 그냥 낡은 비닐 봉지 한 장 줍니다. ㅠㅠ 이게 쿠바지요.

메르까도(마트)에 생수 사러 갔는데 카드 결제가 안됩니다. 미국의 쿠바 경제 제재 탓인지, 쿠바에서는 카드 결제가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페소로도 못 삽니다. 외국인 여행자는 오직 카드, 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어요. 목은 마른데, 생수는 살 수 없고... 나와서 걷다가 맥주집을 발견했어요. 쿠바 맥주가 진짜 시원하고 맛있네요. 단 돈 천 원에 누리는 호사. 맥주가 생수보다 싸고 흔하다니, 이러다 술꾼 되겠네요.

낮잠 한 숨 자고 나와서 다시 걷습니다. 백사장에서 50미터 정도 걸어들어가도 수심이 겨우 허리까지 옵니다. 미국인들이 이곳을 휴양도시로 개발한 이유를 알겠어요. 아바나에서 가깝고 백사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바닷가를 따라 산책하면서

호텔 구경도 합니다. 아담한 수영장이 있는 호텔은 1박에 10만원. 저는 혼자 다니니까 그냥 저렴한 까사, 민박집에서 1박에 5만원에 묵어요. 

길을 걷다 문득...

어미닭과 병아리들을 봤어요.

'병아리떼 종종종 엄마따라 갑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던 풍경. 진짜 오랜만에 보네요. 쿠바에선 닭을 길에 풀어놓고 길러요.

까사에서 아침 먹는데 내 앞에 앉은 70대 커플은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왔어요. 미국 사람들은 쿠바 가기를 두려워한답니다. 쿠바에 여행간다니까, 미국의 이웃들은 하나같이 "왜 그렇게 위험한 곳을?" 하더래요. 제가 보기엔 하루가 멀다하고 총기 난사가 일어나는 미국이 더 위험한데 말이지요.

두 부부는 결혼하고 10년 넘게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대요. 불임 시술도 안 되고, 입양도 번번이 실패했다고요요. 임신한 미혼모를 만나 입양을 약속받으면, 아기를 출산한 엄마가 아기를 보고 그냥 키우기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당시 중국에는 고아원에 여자 아이들이 많았어요. 중국 정부의 한 자녀 정책 탓에 버려진 아기들. 부부는 9개월 된 중국 고아 여자 아이를 입양했는데 너무나 사랑스럽고 현명한 아이로 자랐다고요. 휴대폰에서 20대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데요, 참 보기가 좋네요. 

오바마 시절, 쿠바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 했으나 트럼프가 뒤집어서 너무 속상하다는 얘기도 합니다. 미국 내 불법 난민 상태로 사는 쿠바 인들이 수십년째 고국에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구제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플로리다의 공화당 주지사가 거품 물고 반대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공화당 주지사는 당장 표를 신경써야 하는데 불법 이민 노동자를 합법화하자고 하면 유권자들의 반대가 불보듯 뻔하니까... 

저는 동남아에서 오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인구 고령화가 심해져요. 저는 지역에 강의를 많이 다녀요. 농촌이나 어촌이나 일할 젊은 사람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주 노동자가 아니면 일터가 아예 돌아가지 않습니다.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이주 노동자의 공포를 심어 표를 얻으려 하지요. 저는 좀더 넓은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인구 감소의 시대, 답은 이민 확대에 있다고 믿거든요. 무엇보다 한 사회의 발전은 다양성의 증가에서 옵니다. 누리엘 루비니가 쓴 <초거대 위협>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민을 감행하는 것은 소득 불평등을 전 세계적인 규모로 바로잡는 한 방법이다. 이민자들은 가족들의 안전과 안정, 기회를 모색한다. 역사적으로 이민은 성장 국가에서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이민자가 없었다면 미국은 지금처럼 번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민은 선진경제에서 은퇴자 대비 노동인구의 비율을 개선해 사회보장과 기타 노인복지 프로그램의 압박을 완화한다. 젊은 이민자 집단은 세금을 내고 소득 대부분을 소비해 소비자 수요를 늘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민은 고령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배척주의자들의 반발이 커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정서상 쉽지는 않겠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생각하면 이민을 확대하자는 저자의 생각에 저도 동의하게 됩니다.

 

그날 낮에 썬베드에서 쉴 때, 쿠바인 가족이  내 앞자리에 와서 해수욕하려고 짐을 풀었어요. 그때 직원이 오더니 여긴 관광객 전용시설이라고. 그러자 할머니가 뭐라뭐라 항의를 합니다. "쿠바노가 쿠바 땅에서 쉬겠다는데 왜 안된다는 거냐."

가이드가 렌탈존이라는 팻말을 가리킵니다. 할머니가 가면서 투덜거려요.
"여기가 미국이냐? 여긴 쿠바라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평생 산 할머니에게는 외국인들이 몰려와 돈을 주고 점령하는 바라데로가 마음에 안 들겠지요. 가면서 저를 흘깃 보는데 눈길이 곱지는 않아요.

'근데요, 어르신, 저 외국인들이 호텔에다 하루에 100불씩 내고요. 미국의 무역제재에 시달리는 쿠바 정부로서는 유럽 관광객들이 외화 수입원이거든요. 직원은 그냥 자기 일을 하는 것 뿐이고요.'

아름다운 바닷가를 걸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아요.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 있건, 내가 있는 그곳이 낙원이라 믿으며 살렵니다.  

이렇게 쿠바에서의 하루가 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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