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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by 김민식pd 2023. 4. 24.

전에 소개한 <구디 얀다르크>와 <인생 마치 비트코인>의 저자, 염기원 작가가 신작을 냈네요. 유쾌한 입담을 자랑하는 작가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 문학세계사) 

소설 제목이 곧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해요.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쉬는 시간에 휴대폰을 열었는데, 동영상에 낯익은 얼굴이 뜹니다. "경력 사기 / 매출 조작 / 사기꾼 신동O의 실체를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영상인데, 집나간 오빠가 난데없이 나오네요. 하릴없는 백수였던 오빠가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타트업 대표이자 교수를 가르치는 인기 강사랍니다. 순간 드는 생각, '이 새끼, 사고쳤네.'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자 오히려 오빠 편을 듭니다. '야, 이게 웬일이래? 21세기 허생이 따로 없네!' 오빠에게 전화를 하니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며 조금만 기다리라며 끊어버립니다. '이 인간이 무슨 대형 사고를 기획하는겨?' 이제 서울로 향할 차례입니다. 오빠 잡으러. 

탄광촌에서 나고 자라 동네에는 프랜차이즈 카페도 없는데요. 서울에 오니 그 유명한 스타벅스라는 게 있네요. 주문을 어떻게 하지? 친구에게 SOS를 치니 문자가 옵니다.

'글자 하나 바꾸지 말고 이렇게 말해라. 바닐라 크림 프라푸치노 주문할 건데요. 자바칩 토핑 반반으로 셋 추가해주시고, 에스프레소 휘핑 많이 뿌려주세요. 그러면 짠! 오레오 프라푸치노가 나와.'

'뭐야. 너 나 놀리는 거지? 스벅 진상녀 만들려고.'

'야, 나 지금 진지하기가 과거 시험 보는 선비가 따로 없을 지경임. 내 최애라고! 먹기 전에 꼭 사진 찍어서 보내라.'

둘의 문자를 보며 저는 혀를 내두릅니다. 아, 염기원 작가님의 구라빨은 여전하구먼. 

학창 시절, 투포환 선수로 일했던 주인공은 졸업 후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요. 4조 3교대로 일하며, 6일 동안 잡생각 없이 공장과 기숙사를 오가며 돈을 벌고, 이틀 동안 집에서 쉬며 돈을 쓰며 일합니다. 공장 교대근무가 힘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게 운동보다 편했다. 육상 같은 기초 종목 선수는 건강한 일반인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를 매일 뛰어넘는다. 개인종목 선수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며, 기록으로 평가받는 종목은 더하다. 미시의 세계에 살며 백 분의 일 초, 영 점 일 센티에 운명이 갈리는 게 공장 노동자로 사는 것보다 힘겨웠다.'

제가 요즘 유튜브에 나가서 은퇴를 하니 너무 좋다고 말하면, '철없는 소리'라고 댓글이 달리기도 하는데요.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저는 하루 3시간씩 자며 강행군을 했어요. 그렇게 석달을 달리잖아요? 나중에는 이렇게 살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드라마 피디 중에는 나이 40, 50에 뇌경색이나 심근경색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저의 목표는 살아서 퇴직하는 것이었어요. 

고등학교까지 체육 특기자였던 주인공이 투포환 선수로 사는 것을 포기한 이유.

'고작 4kg이라는 무게가 내게는 버거웠다. 그걸 던지기 위한 훈련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계속 기록을 경신하는 재미에 아무리 힘든 훈련도 감내한 것이지, 열여섯 살에 이미 전성기를 넘긴 조로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제의 나를 이길 수 없음에도 어제보다 더 굵은 땀을 흘려야 하는 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어렸기에 했던 선택이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맞아요, 저도 후회는 없습니다. 시청률의 압박이 피디에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거든요. 아침에 받아드는 시청률 소수점 한 자리의 변화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그래서 평생 주식을 안 했나봐요. 저는 숫자가 내려가는 걸 볼 자신이 없어요. (퇴직연금 펀드 수익률 마이너스 30%, 그냥 잊고 삽니다. 시세창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덜 힘들어요. ^^)

백수이던 오빠가 왜 갑자기 유튜브에서 핫한 인물이 된 걸까요? 혹시 오빠는 '책기꾼'이 된 걸까요? '책기꾼'은 허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고요. 

'허상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실체를 증명할 수 없는 것들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었다. 매달  얼마의 수익이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어 '경제적 자유'를 얻었고, 몇 명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 모든 것들을 이룬 자신은 사실 '흙수저'에 '루저'였다며,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헛된 희망을 파는 게 그들 사업의 본질이다.' 

스타트업 창업으로 돈을 버는 사기꾼 이야기도 나옵니다.

'배달이건, 택시건, 숙박업소건, 부동산이건, 다루는 품목만 다르지, 수요와 공급을 중계하면서 수수료 받아먹는 회사는 똑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업계 최저가, 가격 비교, 총알처럼 빠른 배송, 24시간 친절한 상담, 쾌적하고 안전한 근로 환경으로 인기를 끌며 시장 점유율을 높여 경쟁자를 하나씩 죽인다. 독과점 위치에 이르면 눈치 보지 않고 가격과 수수료를 올려 공급자끼리 경쟁하게 만든다. 그러면 소비자는 질 낮은 서비스에 비싼 돈을 내게 된다.'

이 대목을 읽다 서늘해졌어요. 이 저자는 자본주의의 생리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네? 다시 저자 소개를 보니,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입학 후 벤처 기업 세 개를 연달아 창업하고 공중파에도 출연하며 주목을 받다가 글을 쓰겠다며 돌연 전국 일주를 떠났다.'라고 나오네요. 역시 글의 디테일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오는군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나옵니다.

'지난 2년 동안, 오로지 장편 집필에만 전념했다. 그 고된 시간을 나는 '창작의 행군'이라 부른다. 행군 기간에 쓴 소설 중 가장 최근 것을 세상에 먼저 내보낸다.

창작의 행군을 시작하며 큰 변화를 시도했다. 한번 집필을 시작하면 초고를 마칠 때까지 아무런 예외 없이, 매일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집필 진도를 엑셀로 정리했다. 목표량을 채우면 대개 새벽이었고, 날이 밝기 시작한 뒤에야 잠든 적도 많았다.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달리기라는 루틴에 피아노 연주를 추가했다.

이런 때가 또 올까 싶었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퇴고하다 보면 어김없이 다음 작품 소재가 떠올랐다. 호수공원을 달리다가,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중에, 샤워하다 말고, 섬광 같은 것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그걸 빨리 쓰고 싶다는 욕구가 퇴고의 고통을 압도했다. 퇴고를 마치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와, 이 작가님, 진심 미쳤군요. 표지 뒷날개를 보니 7권의 책 소개가 나옵니다.

'염기원이 온다. 별똥별처럼 쏟아질 염기원의 장편소설.

한국 문단의 전무후무한 괴물 같은 작가. 2년 동안 미친 듯이 집필한 8편의 장편소설을 들고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저같은 책벌레에게 찾아오는 최고의 행운이 뭔지 아세요? 나의 최애 작가가 알고보니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거죠. 다독가인 제가 8권의 책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로또 당첨된 것마냥 기쁩니다.

염기원, 만세!

아래 동영상을 한번 보시면, 아마 여러분도 이 괴물 같은 작가를 만나고 싶어질 거예요.

염기원 작가를 영접하시어요, 책 읽는 즐거움이 확 늘어납니다. 

 

https://youtu.be/h-z8Y5w_T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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