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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요즘 사랑이 힘든 이유

by 김민식pd 2023. 4. 3.

철학을 전공하는 큰딸에게 물어봤어요. "요즘 재미나게 읽은 책 있어?"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신 한병철 교수님의 책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 지성사)를 추천해줬어요. 

알랭 바디우가 쓴 서문에 이렇게 나오네요.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쪽)

요즘 연애, 결혼, 출산을 기피하고 혼자 사는 걸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연애는 사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지금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에너지를 뺏아갑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쉰다고 생각하지요? 오히려 진이 빠질 때가 많아요. 수많은 소비재와 매력적인 이성들이 진열되는 공간을 들여다보다 우리는 조금씩 지쳐갑니다.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를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10쪽)

제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비슷하게 가난했어요. 물론 개중에 부자도 있었지만, 적어도 20대 시절에 누가 돈이 더 많고 적고를 따지지는 않았어요. 당시엔 누구나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신자유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이제는 자산의 격차가 심해졌어요. 사랑을 하기 전에 우선 사거나 갖춰야 할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었어요. 차도 있어야 하고 직업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하고... 그런데 그걸 20대에 다 갖추기는 힘들거든요. 그러니 연애를 하는 게 더 어려워진 게 아닐까... 연애를 하는 사람은 줄고, 우울한 사람은 늘어갑니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20쪽)

에로스와 우울증이 대립 관계라는 말씀, 확 와닿습니다. 저에게 저 둘은 연결관계였거든요. 연애를 못해서 우울했어요. 우울하니까 연애할 기운이 안 생기더군요. 우리는 왜 우울해질까요? 너무 많은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기 때문 아닐까요?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29쪽)

한병철 교수님이 <피로사회>에서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입니다.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지요. 노예 (노비거나, 월급 노예거나)는 규율사회에서 주인에게 명령을 받고 노동력을 착취당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령받은 일은 최선을 다하기 어려워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각 개인이 자기계발의 메시지로 무장하고 스스로를 착취합니다. 이 대목에서 많이 찔립니다. 저도 사람들에게 '영어 공부하라, 글쓰라, 책을 읽으라'하고 강요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성과사회가 무서운 건 타인이 나를 착취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착취자가 된다는 것이거든요.

혹시 나는 너무 과잉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책 마지막 대목에서 어느 학자가 말합니다.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93쪽)

100쪽 조금 넘는 아주 얇은 책인데요, 아주 묵직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

이제 저도 가끔은 부정의 정신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나는 할 수 있어!'가 아니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의 정신이요.

장기 여행 다녀온 후, 매일 블로그 업로드를 하며 살았는데요. 조금 버겁다는 걸 느낍니다. 유튜브 촬영이나 강연 일정이 많이 잡혀서 그때마다 원고 준비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들거든요. 다시 월수금 주 3일 업로드로 돌아갑니다. 지속가능한 노후의 글쓰기를 위한 고민의 결과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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