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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도주냐, 투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김민식pd 2023. 3. 27.

(무료 전자 서평집 <한국 소설이 좋아서 2>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전에 리뷰를 썼는데요. 더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어 서평집에 새로 글을 썼습니다.) 

 

30년 전, 가리봉동의 여공들은 밤낮없이 일했다. ‘공순이’가 눈물을 흘리며 미싱을 돌리던 가리봉동이 가산디지털단지가 되고, 섬유 공장이 IT 회사가 되었지만, 미싱이 노트북으로 바뀌었을 뿐, 하루 열다섯 시간 밤을 새워 일하는 건 변함이 없다. 구로 디지털단지에서 IT 노동자로 일하는 사이안이 꿈꾸는 건 일과 삶의 조화, 워라밸이다. 야근해도 정시출근, 회식해도 정시출근, 야근과 회식이 없어도 새벽 네 시가 되어야 잠드는 생활을 수없이 반복하다 도무지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노조를 만든다. 프리랜서를 포함한 IT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의 문화국장이 된 사이안의 첫마디.


“우리 IT 업계, 거지 같은 회사와 양아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는 팟캐스트 방송을 만들겠습니다.”

‘직장인의 지랄 맞은 심정’, 줄여서 <직지심정> 팟캐스트를 만들고 열악한 IT 산업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는 이안은 구로디지털단지의 잔다르크, 구디 얀다르크가 된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다고 느낄 때,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도주냐, 투쟁이냐. 처음부터 이안이 투쟁을 선택한 건 아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건강을 해칠 때마다 퇴사를 선택하고 달아난다. 숱한 창업과 이직에도 IT 업계의 노동 강도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투쟁을 시작한다. 21세기형 노동소설, 염기원 작가의 <구디 얀다르크>를 읽으며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장에 심히 공감했다. 

드라마 피디로 일하는 나는 촬영 기간에 하루에 2~3시간 밖에 못 잔다. 나는 로맨틱 코미디 전문 연출가인데, 로맨스 장면은 유독 밤에 많이 나온다. 낮에 데이트하는 직장인은 없으니까. 여주인공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숱한 조명과 카메라와 촬영 장비를 동원한다. 여름에 해가 지면 밤 9시, 밤 씬 하나 찍는 데 한 시간, 찍고 장비 철수하고 장소를 옮겨 다시 세팅하는데 한 시간, 밤 씬 4~5개만 찍어도 새벽 4시가 넘는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스태프들은 촬영 버스를 타고 인근 사우나로 이동해 씻고 옷 갈아입고 수면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6시 반이면 일어나 다시 촬영장으로 향한다. 이런 생활이 3개월 이상 이어진다.
<내조의 여왕>이란 드라마를 만든 후,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았고, <여왕의 꽃>을 찍을 때는 3개월 동안 감기가 심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영양제 주사라도 맞으려고 병원에 갔더니 그러더라. “이렇게 비싼 주사 한 방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평소에 운동하고 숙면을 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루 2시간 자고 몽롱한 상태에서 대본, 연기, 촬영에 대한 결정을 내리느라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했다. 밤샘 노동은 2급 발암 물질이라는데, 목숨을 걸고 일하는 기분이었다.

2010년 MBC 노동조합에서 부위원장 제의가 온 건 3년간 다섯 편의 드라마를 만들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였다. ‘노조에 파견 가면, 잠은 푹 잘 수 있겠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노조 집행부에 가담했다가 2012년 MBC 170일 파업에 휘말렸다. 예능 피디로 일한 경험을 살려 <MBC 프리덤>이라는 화제의 파업 홍보 영상을 만들었는데, 회사의 높은 분들이 그걸 어여삐 보셨나 보다. 대기 발령, 정직 6개월, 교육발령으로 이어지는 징계 3종 세트를 받고 드라마국에서 쫓겨났다. 잠깐 쉬려고 노조에 들어갔다가 백수가 될 판이다.​

회사는 나를 송출실로 발령했지만, 나는 유배지에서도 권토중래를 노렸다. ‘그래, 당분간 잠 푹 자면서 몸을 만들고, 여유로운 시간에 소설을 읽으며 드라마 원작을 찾아봐야겠다.’ 그때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만났다. 아직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재미난 작품이 많아 반가웠다. ‘그래, 여기서 아직 판권이 팔리지 않은 숨은 보석을 발굴할 수 있겠구나!’ 마치 나만의 무림비급을 얻은 기분이었다.

교대 근무를 하며 소설을 읽던 드라마 피디는 다시 제작 현장에 복귀해 옛날의 영광을 재연했는가?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7년이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2018년에 복귀했는데,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었다. 드라마 시장의 판도는 그새 바뀌어 공중파의 독과점은 깨지고, 작가들은 종편이나 넷플릭스를 선호했으며, 제작사들은 노조 경력이 붙은 감독을 부담스러워했다. 무엇보다 내가 그 새 나이 들어버렸다. 밤을 새워 일하는 드라마 감독에게는 체력이 곧 실력인데, 나는 50을 훌쩍 넘겨 노쇠한 피디가 되어버렸다. 결국, 회사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여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피디의 삶을 접었다.

인생은 절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괜찮다. 힘든 시간 동안 재미난 소설을 읽으며 즐겁게 버틴 게 어디인가. 내가 발견한 활자의 즐거움을 영상의 재미로 구현하지 못해도 괜찮다. 여전히 나는 매년 20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장강명 작가가 <당선, 합격, 계급>에서 척박한 서평 문화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글을 읽고 다짐했다. 남은 평생, 책을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며 살리라. 유튜브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 꼬꼬독>이라는 책 소개 코너도 진행한다. 내가 누린 독서의 즐거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살고 싶다.

소설 <구디 얀다르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누구나 꿈은 꾼다. 중학교 때는 서울대를 꿈꾸며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SKY를 꿈꾼다. 2학년이 되면 인서울을, 3학년이 되면 수도권 4년제 대학을 꿈꾼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기를 꿈꾸고 늙으면 더 오래 살기를 꿈꾼다. 부모의 장수를 자식의 성공을 꿈꾼다. 부자도 거지도 더 많은 돈을 꿈꾼다. 누군가는 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모두의 꿈이 다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불멸을 꿈꾸던 이들은 모두 영멸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을 버리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 하나씩 차근차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109쪽)



소설이란 무엇인가? 꿈같은 이야기다. 현실이 고달플 때, 나는 꿈결 같은 세상, 소설 속 허구의 세계로 달아났다. 좋은 소설가는 그 꿈을 꼭 현실처럼 오밀조밀하게 만든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주인공처럼, 꿈을 꾸는 이가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공들여 꿈의 세계를 직조한다. 염기원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이안인지, 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고, 작가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쓴 건가, 모든 일하는 사람의 현실이 이런 건가, 궁금했다. 재능있는 이야기꾼을 만나면,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이 즐겁다. 좋은 꿈을 꾸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2>이 나온다는 소식에 만세를 외쳤다. 퇴사했으니 영상화를 고민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제작비를 따져보고, 밤 촬영의 빈도를 계산하지도 않는다. 그냥 독자로서의 재미에 충실하면 된다. 2편에 소개되는 책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으며 살리라. 기나긴 노후여 어서 오라, 여기 활자 중독자가 있으니.


소설 소개하는 글에 내 이야기가 너무 많아 죄송하다. 나는 스포일러를 유독 싫어한다. 소설의 전개나 결말은 책을 찾아 읽을 분을 위해 아껴뒀다. 염기원 작가님은 ‘구라빨’이 장난이 아니다. 재치있는 문장에 배를 잡고 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글에 줄을 치며 읽었다. 많은 분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달아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선택이 어려울 땐, 결정을 미뤄도 된다. 잠시 재미난 책을 읽고 머리를 식힌 후, 더 차분한 상태에서 결단을 내려보자. 오늘은 일단 소설을 읽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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