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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달과 6펜스

by 김민식pd 2023. 3. 6.

친구들을 만나면 물어봅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은? 그때 <달과 6펜스> 얘기가 나왔는데요. 살짝 의외였어요.

"어, 그 책, 20대에 읽어봤는데, 별 느낌이 없었는데요?"

"그 책은 50대에 읽어야 더 좋아요. 중년의 나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하게 해주거든요." 

그래서 찾아읽었습니다.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지음 / 송무 옮김 / 민음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던 중년의 증권 브로커가 어느 날 갑자기 맨몸으로 집을 나가버립니다.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한 부인은 지인에게 부탁합니다. 남편이 바람이 난 것 같은데,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걸 용서해줄테니,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고요. 파리의 고급 호텔에서 젊은 애인과 도피 행각을 벌인다는 남자를 찾아가는데, 어랍쇼? 초라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혼자 지내고 있어요. 여자 때문에 부인을 떠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화자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잘 나가던 증권 브로커가 무엇때문에 파리의 뒷골목에서 거지꼴로 사는 거지?

남자가 말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나는 한참 동안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자가 돌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아주 젊었고 상대방은 내게 중년으로 보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딴 건 몰라도 몹시 놀랐던 것만은 기억한다.

"아니 나이가 사십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림을 그려본 적은 있나요?"

"어렸을 적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소. 하지만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 장사일을 하게 만들었지. 일년 전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소."

 

회사를 다니며 야간반에 나가 그림을 배웠다는 남자에게 묻습니다. 

"당신 나이에 시작해서 잘될 것 같습니까? 그림은 다들 십칠팔 세에 시작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67쪽) 

수입 좋은 직업에 교양 있는 아내와 잘난 아들딸을 둔 화목한 중산층 집안의 가장이 왜 세상의 모든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무명 화가의 삶을 선택하는 걸까? 어린 시절에 책을 읽을 때 이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나이 50이 넘어보니 알겠습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새로운 선택이 찾아오기도 해요.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로 남겨두고, 죽기 전에 반드시 해내고 싶은 무언가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달과 6펜스' 밤하늘에 빛나는 둥근 달과 6펜스짜리 은화 동전,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납니다. 하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지요. 6펜스짜리 동전은 내 호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며 만족감을 주지만, 달은 저 하늘에 박혀 있어 아무리 갈구해도 손에 넣을 수 없어요. 증권 거래인으로 평생을 살던 주인공은 평생 6펜스짜리 동전을 모으고 또 모으며 살았어요. 어느날 문득 밤하늘에 걸린 달을 봅니다. 돈에 눈이 멀었던 사람이 갑자기 달빛에 눈을 뜨게 되는 거죠.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건 6펜스 동전이 아니라 저 하늘에 걸린 달이 아니었을까?

 

처자식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중년 남자에게 화자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아무리 얼르고 달래도 설득할 길이 없어요.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인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야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77쪽)

양심에 대한 해석이 재밌네요. 인간을 공동체에 묶어두는 사슬이다... 저는 타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건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양심에 찔려서 안 한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 '양심도 없소?'라고 묻는 건 효과가 없어요. 양심은 주관적 영역이니까요. 

<달과 6펜스>는 출간 직후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는데요.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회에 깊은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어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전쟁이라는 억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던 거죠.

6펜스를 쫓을까, 달을 쫓을까? 정답은 없어요. 다만 저라면, 6펜스 동전을 먼저 모은 후,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면 달을 찾아 떠날 것 같네요. 달나라에 가진 못해도 호수에 뜬 달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살 수는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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