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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사표 쓰고 싶을 때 읽는 책

by 김민식pd 2023. 2. 27.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통쾌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첫 직장에서 사표를 내던 날이었어요. 치과 외판 사원으로 일하며, 영업을 다니는 건 쉽지 않았어요. 불쑥 치과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바쁜 원장님들께 욕을 먹고 쫓겨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참아야지요. 방문 외판 사원이 환대를 기대하며 일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러운 건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었어요. 성격이 고약한 치과 원장은 안 찾아가면 그만인데, 회사 상사는 싫어도 매일 봐야하니까요. 

"김민식 씨, 나랑 회사 옥상에 올라가서 권투 한 번 할까? 넥타이 풀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말이야."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상사를 보며 진심 두려웠어요. '너는 좀 맞아야겠다.'라고 하는 거잖아요? 요즘 같으면 직장내 괴롭힘으로 신고라도 했겠지만 당시는 1994년, 직장 내 권위적인 상사들이 활개치던 시절이었지요. 회사에서 부하직원 뺨을 치는 사람도 있었는데요, 뭘.

아마 그때 도서관에 가서 봤다면 무척 반가웠을 책이 한 권 있습니다.  

<회사 그만 두는 법> (양지훈 / 에이도스)

노동법 전문 변호사인 저자는 직장이란 곳의 살벌한 생리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인사평가는 왜 하는 것일까요?


'회사는 '부모님이 시켜서,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을 갚고 돈을 벌어야 해서' 취직한 사원과 '내가 진정 일하고 싶어서' 취직한 사원을 질적으로 구분할 수도 없다. 이제 갓 입사한 사원이 실제 성과를 내는가를 기준으로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회사는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회사원들은 학교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삶, 시험 성적과 학점에서 벗어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분기나 반기별로 중간 평가를 받고 매년 말 종합 인사 평가를 받는, 그래서 더 촘촘해진 점수 체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회사의 평가가 학교보다 더 냉혹한 것은 그 결과와 평가받는 자의 생존이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며, 한때나마 우리가 입사 원서를 내며 회사에 대한 짝사랑을 먼저 했던 을의 위치가 회사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승진 심사가 코앞으로 닥쳐온 30대 가장들을 위해 부서 내 상대평가를 할 때, 20대 젊은 사원들이 부당한 평가를 감수하기도 했지요. 요즘 이런 식으로 평가하면 블라인드 앱에서 난리납니다. 신입사원들이 보기에 인사고과에서 최하점수를 받는 건 불공정한 일이에요. 입사 3년까지는 일에서 성과를 내기도 어렵고, 또 일을 못한다고 해도 그게 상사에게 아직 업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지, 개인의 잘못은 아니거든요. 90년대생들은 어려서부터 치열한 입시 경쟁, 입사 경쟁에 시달렸고요. 성적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기에 부당한 인사고과는 참아주지 않아요.  

회사가 이토록 가혹한 인사 평가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정된 직위 자원을 배분하기 위해 진급 승진 대상자를 불가피하게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죠. 인건비를 최소화하여 이윤을 확대하고 누적해야 하는 구조적인 환경 탓에 회사는 끊임없이 조직원의 생산성을 평가합니다.

'비정한 자본 시장에서 회사 조직이 유지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라미드 조직, 부하 직원이 많고 상급자가 적은 하후상박의 형태다. 매년 동일한 수의 근로자가 입사한다고 가정할 때 일정한 수의 근로자가 매년 조직을 이탈해야만 그 형태는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사용자는 사원들이 어느 정도 근무한 후에는 알아서 회사를 떠나 주기를 바라게 된다.'  

'퇴사의 시점을 안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이상적인 퇴사 시점은 언제일까요? 회사 입장에서는 연봉 수준보다 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시점 아닐까요? 실제 받는 연봉보다 생산성 수준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관리자 직급의 직원들이 그 대상이지요. 경영 위기에 빠진 회사가 단행하는 희망퇴직이 근속 년수 10년 이상을 조건으로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회사의 관료제란, 물리적으로 지시하는 자보다 지시받는 자의 수가 더 많은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 조건에서 언제까지고 현업에서 일상적 업무를 유지할 수는 없고 적정한 시점이 되면 파트장, 팀장, 본부장 등 보직의 직책을 맡는 관리자가 되지 않으면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어떤 자연스러운 시점'이 도래한다.'

2020년 겨울에 저는 그 시점이 제게 도달했음을 깨달았어요. 공중파 드라마 시장이 위축되어 더이상 연출을 하지는 못하는데, 성과도 올리지 못하는 50대 피디가 자리에 연연하며 버틸 수는 없다고 느꼈어요. 드라마 제작사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데요. 학교나 도서관에서는 저자 강의를 꾸준하게 불러주셨어요. 그때 느꼈지요. '아, 나가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서.'

노동법 변호사로서 저자가 하는 조언이 있어요.


'사표는 절대 금지.'

변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조언은, '절대 사직서를 제출하지 마라'는 것이다. 회사의 어떤 권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사직서는 '회사가 원하는 대로' 노동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사직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회사에 의해 해고를 당하라.​ 사직은 노동자가 스스로 퇴직하는 것이므로 부당 해고로 다툴 여지가 없지만, 해고의 경우 근로기준법 등에 따라 그 요건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부당 해고를 다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표 내지 말고 해고를 당하자. 해고된 노동자는 집으로 돌아가자. 그동안 못했던 가사도 열심히 하고 아이와 놀아주자. 그리고, 해고 무효 확인의 소를 회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것이다. 1심 판결이 나오기 까지, 짧게는 6~8개월 길면 1년이 넘게 걸릴 수 있다. 승소를 확신하는 노동자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고 여전히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패소가 걱정된다면 단기 근로를 하면서 이직을 준비해 보자(소송 중 근로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승소 후 공제하면 그만이다).
승소 판결을 받게 되면, 원직으로 복직되고 실직 기간 미지급된 임금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 패소하면 어떤가? 미지급 임금을 받지 못할 뿐이다. 노동자가 잃을 게 무엇인가? 사실은, 노동자가 사표를 안낼 경우 회사가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권고사직은 쉽지 않아요. 그러니 사표에 꿀을 발라주는 게 명예퇴직 제도입니다. '돈 조금 더 드릴테니 제발 나가주세요.' 사표내, 명퇴냐, 해고냐,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년퇴직은 더더욱 어려운 길이고요. 직장인으로서 나를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가슴에 사표 한 장씩은 품고 살아야지요. 다만 그 사표를 던지기 전에 꼭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책입니다.  

직장인으로 사는 동안은 매일 행복하시길 소망합니다. 퇴직하면 월급날이 그리워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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