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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변수로 가득 찬 세상, 상수가 필요하다

by 김민식pd 2022. 11. 28.

중고생 진로 특강을 가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피디가 될 수 있을까요?" 공대를 나온 제가 피디의 꿈을 품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서관을 찾아가는 것이었어요. 피디가 쓴 책이나 피디가 하는 일에 대해 쓴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런 독서는 전공 공부 못지않게 든든합니다. 방송 제작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피디가 직접 쓴 책이 나왔어요. 피디 지망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직면하는 마음> (권성민 지음 / 한겨레출판)

저자는 MBC 출신 예능 피디고요. 회사 생활하며 마음 고생이 심할 때, 만나서 서로 위로하며 수다 떨던 친구에요. 플레이스테이션 3 게임이나 <원피스> 같은 만화를 추천해주는 후배지요. 예능 피디는 '우리 시대의 광대'입니다. 온 국민을 상대로 놀아드리는 게 우리 일이고요. 그러자면 일단 내가 잘 놀아야해요. 즐거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죠. 권성민 피디가 그래요. 기준이 확실한 사람.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며 잘 노는 친구인데요. 그의 책을 읽으면, 잘 나가는 인싸 친구가 고시랑고시랑 재미난 수다를 들려주는 느낌입니다. 거기에 신세한탄과 약간의 자조섞인 농담까지 더해져 더욱 재미나지요.

 

피디라는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그 평가를 혼자 오롯이 다 받는 사람입니다. 

'프로그램이 잘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출연자가 잘했을 수도 있고 편성이 좋았을 수도 있다. 사실 한두 가지 장점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테니 다 같이 잘했다는 뜻이다. 상찬은 모두가 나눈다. 하지만 결과가 안 좋으면 그건 모두 PD의 책임이다. 연출이 별로여도, 출연자가 실수했어도, 미술이 이상했어도 결국 다 PD 잘못. 망할 때 제일 괴로운 사람이 진짜 주인이다.'

이 말이 확 와닿습니다. '망할 때 제일 괴로운 사람이 진짜 주인이다.' 인생이 그렇지 않나요? 인생이 잘 풀리는 건 여러 요인이 합해진 결과고요. 그럴 때는 도와준 많은 분들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안 되면 오로지 내 탓입니다. 인생이 뜻대로 안 될 때 남탓을 하면 결국 사람을 잃습니다. '그 친구는 일이 안 풀리면 주변 사람들 원망하더라?' 그런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이 하나둘 떠납니다.

일을 고를 때, 저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합니다. 일을 건성건성하면 재미가 없더라고요. 물론 몸바쳐 일하다 성과가 안 나오면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이 실은 성장의 동력입니다. 건성건성 힘들지 않게 일하는 사람은 괴로움이 없으니, 고민이 없고, 열심히 할 생각이 없으니 성장이 없어요. 비록 망했을 때 괴롭더라도 저는 일단 제 일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요.

촬영과 방송 사이에는 편집이라는 과정이 있고요. 편집은 끊임없이 덜어내는 과정입니다. 가편집, 재편집, 완편집, 계속 분량을 덜어내어 가장 재미난 것만 남기는 과정이지요. 시간이 넘칠 때, 무조건 재미없는 것부터 덜어내는 피디가 있고요. 메시지를 남기려고 곁가지는 다 쳐내는 사람도 있어요. 확고한 철학을 갖고 편집을 하는 피디도 있지만 그게 없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PD도 괴롭고 함께 일하는 동료도 괴롭습니다. 이렇게도 만들어보고, 저렇게도 만들어보고, 일이 두 배, 세 배가 되는데 방송 시간은 정해져 있어요. 결국 자야 할 시간을 가져다 씁니다.

'타협할 수 없는 장면에 공을 들이느라 밤을 샐 때는 다 함께 달려간다는 고양감이라도 있지, 뭘 타협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느라 밤을 새고 있는 팀은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온다. PD의 타협하는 능력, 즉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능력은 방송의 완성도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제작 현장의 첫번째 복지이기도 하다.'

삶에서 중요한 능력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지요.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거든요. 시간이나 돈이라는 자원의 유한성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끊임없는 타협이 인생의 과정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도 타협하지 않는 거장은 마스터피스를 남기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타협하지 않는 PD가 만나게 될 것은 방송사고이다. 삶이 거장의 예술이면 좋으련만, 실제로는 완성도를 기다려주지 않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방송시간에 더 가깝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어떻게든 나가게 되어 있는 방송처럼.'

후배가 쓴 책을 읽으며 또 이마를 칩니다. 그렇구나! 인생에서 타협하지 않고, 주어진 모든 과제를 다 해내려하는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은 번아웃이구나. 선택과 집중이 행복한 일터를 만들고요, 내 삶의 복지도 챙깁니다. 

피디로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저자는 4년째 필라테스를 하고 있어요. 처음 시작할 땐 뻣뻣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꾸준히 하면서 늘고 있다고요. 저자의 인스타에 올라오는 필라테스 사진을 보면, 기예에 가까운 동작도 선보입니다.

'꾸준히 하면 는다. 재능이 있든 없든, 변화가 느껴지든 아니든, 그냥 때 되면 하고 하기 싫을 대도 하고 성취감이 없어도 그냥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훌쩍 나아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꾸준함에는 생각이 필요 없다.'

저는 이 글이 그렇게 든든했어요. 삶에는 끊임없이 고난과 시련이 닥쳐옵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지요. 이럴 때 일상을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좋은 루틴이 필요합니다. 운동이나 독서, 글쓰기처럼 힘들 때  하면 집중할 수 있고, 일단 수행하고 나면 성장하는 기분이 드는 어떤 습관. 그게 내 삶을 지켜주는 상수입니다. 

'변수로 가득 찬 세계. 그 어떤 것도 상수가 아닌 세계다. 대중 콘텐츠의 제작만 그러하겠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직업인들의 세계란 다들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변수로만 이루어진 수학 문제에는 답이 없다. (...) 변수로 가득 찬 세계를 계속 헤쳐 나가려면 발 디딜 수 있는 단순한 상수 몇 개 정도는 쟁여두자.'

인생에는 상수가 필요하다는 말에 밑줄 긋습니다. 

피디 지망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 했지요? 아닙니다. 변수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에요.

오늘도 책에서 인생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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