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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힘들 땐 긍정적 착각을

by 김민식pd 2022. 11. 11.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가 있어요. 어류 분류학자입니다.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종을 찾아 전 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을 발견했어요. 새로운 물고기를 수천 종 낚아 올렸고,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표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1906년 어느 봄날 재난이 닥칩니다.

1906년 4월 18일에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강도 7.9의 지진으로 3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요. 과학자의 연구실에 모아둔 수백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납니다. 표본과 이름표가 난장판이 된 바닥에 흩어져요. 인류 최초로 발견하고 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미지의 존재들로 돌아가는 순간이에요. 30년간 노력해온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갔다고 상상해보세요. 눈 앞에 펼쳐진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과학자는 바늘 하나를 찾아 듭니다.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 하나를 집습니다. 바늘을 물고기의 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 붙이고요. 지진의 잔해에서 구해낼 수 있는 모든 물고기에 이 작은 동작을 반복합니다. 물고기에 이름표를 다는 사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다룬 책을 소개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 곰출판)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습니다. 정의, 향수, 사랑, 죄 같은 개념들이 원래 존재했던 게 아니라, 누군가 그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보는 거죠. 이런 사상에 따르면, 바닷속에 사는 무수한 물고기도 동물학자가 발견하고 채집하고 분류하고 학명을 붙여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거죠. 

책도 그렇지 않나요? 도서관이나 서점의 서가에 아무리 많은 책이 줄지어 있어도 읽어주는 독자가 하나도 없으면 책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2022년 한 해 동안 독서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걸 보고 찾아 읽었고요. 이 책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함께 고민하게 해주는 책이거든요.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는 삶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삶은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나 코로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좌절이 닥쳐오거든요. 그런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끈기입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라는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있어요. 여러 해 동안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인데요. 왜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힘들어하는지 이유가 궁금했어요. 성적이 높은 학생들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지요. 심리학 박사가 되려고 결심하고 공부를 합니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Grit’, 끈질긴 투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릿은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입니다. 더크워스는 최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요리사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습니다.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버리세요. 끈질긴 투지가 성공의 지표입니다. 끈질긴 투지, 그릿을 장착하면 굿라이프, 좋은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릿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긍정적 착각입니다.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의 지표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더크워스가 내린 그릿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해요.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 졸이지 않았다.”

피디로 20여 년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요. 스타가 된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닌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긍정적 착각이에요. 배우는 기다리는 게 일입니다. 오디션 기회를 기다리고, 캐스팅 제안을 기다리고, 대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촬영을 기다리고, 방송을 기다립니다. 기나긴 시간을 무명의 신인으로 버텨야 하는데요. 이럴 때 필요한 게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좋아할 것이라는 긍정적 착각입니다. 

신인이 스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긍정적 착각인데요. 일단 뜨고 나면 반대의 힘이 가해집니다. 스타로서 인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부정적 착각이거든요. ‘이번에 출연한 영화가 망하면 어떡하지?’ ‘술 먹고 운전했다가 기사가 나면 어떡하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논란이 되면 어떡하지?’ 뜨고 난 후에도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할 거야.’라는 긍정적 착각을 유지하면, 사고를 치기 쉬워요. ‘음주 운전쯤이야, 인성 논란쯤이야, 여성 편력쯤이야, 뭐 어떻겠어?’ 라고 생각하다 큰코다칩니다. 내가 가진 인기, 사라지는 건 한 방이야, 라는 부정적 착각을 가져야, 매사 조심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되고, 촬영장에서 성실하게 임합니다. 그 결과 오래오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좋은 삶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지금 내가 가진 게 별로 없다면 언젠가는 잘 될 거라는 긍정적 착각, 내가 이룬 게 많다면 이걸 한방에 다 잃을 수 있다는 부정적 착각.

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재난이 닥쳐올 때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다양성이라 말합니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습니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고요. 우리 눈에 하찮게 보이는 생물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초록 점 같은 남조세균cyanobacteria이 있어요. 인간의 눈에 너무나 하찮게 보여 한동안 이름도 붙이지 않았어요. 1980년대 어느 날,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의 상당량을 이 남조세균들이 생산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했어요. 이제 우리는 이 작은 초록 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생태계의 다양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해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개념이 있어요. “민들레 원칙”이라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지요.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지만, 때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가 되거든요.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입니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고요.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각자의 개성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요. 그런 개성이 모여 어우러진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사는 것, 그게 좋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책입니다. 여러분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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