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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슬픈 세입자의 일기

by 김민식pd 2022. 11. 7.

짠돌이로 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공짜지요. 책벌레인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공짜로 읽는 책입니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무료 전자책입니다.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디서든 심심할 때 펼쳐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장강명 작가님이 재미난 한국 소설을 소개할 목적으로 기획한 <한국 소설이 좋아서>2권이 나왔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3789105

 

한국 소설이 좋아서 2 - YES24

재미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장편소설 30편을 추천합니다!동시대를 사는, 다양한 장르의 한국 소설가들을 만나보세요작가, 기자, 편집자들이 함께 쓴 서평집, 무료로 받아가세요무료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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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이 좋아서> 1권을 블로그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2권에서 실을 원고 청탁을 받았어요. 지난 5년 동안 제가 읽은 한국 소설 중 한 편을 골라 리뷰를 썼어요.  염기원 작가님의 <구디 얀다르크> 리뷰, 위의 책에서 만나보세요. 염 작가님이 새 책을 내셨네요. 얼른 찾아읽었습니다.

<인생 마치 비트코인> (염기원 / 은행나무)

소설의 주인공은 오피스텔 관리인입니다. 그를 고용한 건물주는 서울 시내에 여러 채의 건물을 갖고 있고요. 주인공은 그 중 하나를 관리합니다. 시골에서 상경해 서울에서 방 한칸 구하기 힘든 주인공에게 건물주가 후한 제안을 합니다. 여섯 평짜리 오피스텔 방 한 칸을 줄테니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건물 관리 업무를 보라는 거지요. 그가 하는 일 중 가장 힘든 건 자살한 세입자의 방 정리입니다. 가난한 동네의 원룸텔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죽는 사람이 많을까요? 

'동네가 후져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웃기는 소리다. 재작년 서울시에서 자살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강서구와 노원구이고, 이곳 관악구는 3위다. 이걸 보면 그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숫자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통계로 사기 치는 꼴이다. 대학 나왔다는 놈들도 이런 사기에 속는다.
같은 통계에서 4위가 바로 강남구다. 강남 3구 중 하나인 송파구에서 자살한 사람 수는 영등포구나 금천구보다 많다. 자치구 인구를 고려하지 않으니 모순이 생긴다. 자살자 숫자보다 자살률로 따지는 게 타당하다. 서울의 자치구 인구는 송파, 관악, 강서, 강남, 노원구 순이다. 만 명당 자살률을 계산하면 관악구는 7위로 뚝 떨어진다.' 
​(29쪽)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시련이 있습니다. 부자건 빈자건, 삶은 공평하게 무게를 지웁니다. 죽음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냄새를 지우는 건 더 힘들어요. 그래서 특수청소업체를 부릅니다. 특수청소업체 신대표는 증권사에 다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요리 학교에서 스시 만드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다 우연히 특수청소센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령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고독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일본의 추세를 한국도 곧 따를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회칼을 내려놓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초밥집 대신 특수청소업체를 차렸습니다. 

어느날 세입자가 자살을 했는데 특수청소업체의 신대표가 연락이 안 됩니다. 일이 너무 많은가 봐요. 건물주에게는 용역을 준 것처럼 보고해서 급여외 소득을 올려보겠다는 생각에 주인공이 직접 방을 청소하는데요. 유품 중에서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뚜껑을 열어본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한 번도 신지 않은 아이 신발 한 켤레가 상자 안에 곱게 놓여 있었다.'

(33쪽)

이 대목에서 책을 읽던 내 마음도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세입자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녀는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계간지에 투고하고, 부질없는 시간과 소용없는 노력을 들이는 과정을 반복했다. 세상은 자신의 글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녀만 그 사실을 몰랐다. 나 같으면 차라리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연재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혼자 땅굴만 깊이 파고 있으면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건 종교인이나 할 짓이다.'

(85쪽)
​ 
드라마 작가 교육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요. 드라마 대본은 그 자체로 완성품이 아닙니다. 촬영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제작되어야 결과물이 나오지요.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은 극본을 쓰며 힘들어합니다. 방송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쓰는 대본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피드백 없이 낙방 통지만 오는 공모전 도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요. 혼자 틀어박혀 글만 쓰지 말고, 세상 물정을 알려주는 책도 읽고, 사람들을 만나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들어보기도 하시라고 조언을 드리는데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무작정 열심히만 한다고 되지 않는 일도 있으니까요.

오피스텔 관리인인 화자는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의 첫 인상을 노트에 적습니다. 아마 세입자들을 구분해 잘 기억하려고 그러는 거겠지요. 첫인상으로 '게을러보인다'라고 적었어요. 세입자의 일기를 읽다 깨닫습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았던 사람이구나... 게을러보인 그 사람은 너무 열심히 살아서 번아웃을 겪은 겁니다. 번아웃이 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요.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집니다. 게으른게 아니라 지쳐서 그런 겁니다.

제가요.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는 드라마를 연출할 때, 한겨울에 야외에서 사흘 연속 밤샘 촬영을 하고​ 새벽에 퇴근하고 전철을 탄 적이 있어요. 졸다가 문득 둘러보니 만원 전철인데 제 주위에만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전철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며칠째 잠도 못자고 면도도 못하고 씻지를 못한 중년 남자가 커다란 파카를 이불처럼 두르고 꾸벅꾸벅 서서 졸고 있더군요. 노숙자인줄 알고 사람들이 저를 피한 겁니다. 치열하게 살던 시절, 저는 아마 게을러보였을 것 같네요. 

슬픈 세입자의 일기를 담은 <인생 마치 비트코인>,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다음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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