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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인생의 필승전략

by 김민식pd 2022. 10. 10.

요즘 탁구에 빠져 있습니다. 평생 독서와 여행이 최고의 취미라 여기며 살았는데요. 은퇴 후, 운동의 즐거움에 눈을 뜰 줄은 몰랐어요. 같이 탁구치는 회원들끼리 하는 말. "탁구가 이렇게 재미날 줄 몰랐다. 탁구가 없었다면 하루하루 무슨 낙으로 살았을지 모르겠다." 저도 그래요. 탁구가 미치도록 좋아요.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받고요. 매주 한번씩 회원들과 단식 리그전을 합니다. 레슨만 받고 재미로만 치면 실력이 느는 게 잘 보이지 않아요. 시합을 해야 느는 게 보이지요. 운동의 즐거움에 눈을 뜬 제가 최근 재미나게 읽은 소설이 있어요.  

<스피드> (권석 / 넥서스)

집안 사정으로 바다 근처 마을로 이사를 간 고등학생이 하나 있어요. 오래 사귄 친구들과 정든 서울을 떠나 동해안 바닷가로 이사를 가니, 우울합니다. 그런 주인공에게 수영부 활동이라는 기회가 옵니다. 그냥 재미삼아 하는 게 아니라, 매일 훈련도 받아야 하고, 전국 대회 출전도 해야 합니다. 훈련의 양이 만만치 않아요.

'수영부 선배는 훈련은 질보다 양이라고 했다. 양이 넘치면 질로 변한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메기의 철학은 학교 앞 분식집 사장님의 신념과 닮았다. 사장님도 질보다 양이었다. 메기는 수영을 잘 못하는 것은 용서해도 훈련을 게을리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 분식집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맛이 없는 것은 용서해도 양이 부족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신봉하는 '양질 전환의 법칙' 탓에 매일 아침 기절 직전까지 발차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58쪽)

제가 탁구 레슨을 받은 지 3년째인데요. 아직도 수업 시작할 땐 코치님이 저의 기본 스윙 동작부터 잡아주십니다. 멋지게 커브 드라이브도 치고 싶고, 날카로운 백 서브도 배우고 싶은데요. 코치님은 항상 기본부터 시킵니다. 그래요, 인생은 한방에 좋아지지 않아요. 꾸준한 반복이 쌓여야 어느 순간 변하는 거죠.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질풍노도의 시기, 감정을 통제하는 건 왜 이리 힘들까요.

"할배, 나는 인생이 왜 이리 힘들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우린 매번 여행을 떠나잖아, 왜? 고생이 즐거우니까. 고생이 유익하니까. 고생하면서 생각이 바뀌고 그러면서 나를 알게 되고 세상을 이해하게 되지. 그게 인생을 잘 사는 법이야."

고생을 마다 않고 일단 길을 떠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라이벌 고등학교와 수영부 대결이 펼쳐집니다. 평영, 배영, 접영, 자유형, 계영, 여러 차례 개인전을 하고 최종 승패를 따져 우승팀을 가리는데요. 객관적으로 불리한 팀에게 필요한 전략은 무엇일까요? 선수를 냉정하게 A급과 B급으로 나누는 거죠. 상대팀 에이스가 출전할 경기에는 우리 팀의 B급 선수를 넣습니다. 나머지 경기에 A급 선수를 투입해요. 개개인의 승패는 관계 없어요. 11개 레이스 중에 6개만 따내면 팀은 이기는 겁니다.

저는 이게 인생의 필승전략이라 생각합니다. 다 이길 필요가 없어요. 이길 수 있는 판에 승부를 걸면 됩니다. 수능은 전과목을 다 잘해야해요. 대학 입시를 망쳤으면 인생 종친 걸까요? 스무 살 이후에 진짜 승부가 펼쳐집니다. 좋아하는 과목, 자신있는 과목 딱 하나로 승부를 걸면 됩니다. 저의 경우, 그게 영어였어요. 대학 전공 성적은 포기하고 영어에 올인했지요.   

은퇴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잘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올인하면 됩니다. 독서와 글쓰기, 평생을 지속하고 싶은 일입니다. 부족한 점은 여전히 많지만, 질보다 양이라고 믿습니다. 꾸준히 읽고 쓰다보면 언젠가는 더 좋아지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요. 

<스피드>, 스피디하게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쓴 분은 MBC 예능 피디 선배인 권석 작가님입니다. 회사 생활을 하는 틈틈이 문예 창작 아카데미를 열심히 다니며 소설 습작을 쓰시더니, 기어코 해내시네요. 이 소설로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대상을 수상하셨어요.   

'<스피드>에는 속초 바다의 깊고 푸른 에너지가 시종일관 넘실거린다. 스토리를 향한 작가의 부드러운 다이빙, 사건을 빚어내는 역동적 스트로크, 인물의 거리를 좁히려는 막판 스퍼트 그리고 재생을 위해 손을 뻗는 피니시까지... 새로운 챔피언의 등장에 갈채를 보낸다.'

-해이수 (소설가)님의 심사평. 

글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피디가 소설을 쓰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군요. 언젠가 드라마나 영화로 영상화하기 참 좋은 소설입니다. PD 선배님이 쓰신 책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요. 그냥 놀라운 신인 작가의 등장에 갈채를 보내게 됩니다. 

다음 책도 기다립니다, 권석 소설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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