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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나쁜 형사는 되지 말자

by 김민식pd 2022. 9. 12.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저는 연휴 계획을 망쳤어요. 장강명 작가님 때문에...

은퇴를 한 제게도 추석 연휴는 반가워요. 명절에는 약속이나 일정이 없으니까요. 그래, 4일동안 작정하고 틀어박혀 소설을 읽자!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장강명 작가님의 신작!

<재수사 1,2> (장강명 / 은행나무)

가 있으니까!

    

 

 

연휴를 며칠 앞두고 지방에 강의하러 가는 길에 열차 안에서 읽으려고 책을 챙겼어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백을 시작하기에도 그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것 같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칼로 두 번 찔러 죽였다.' 

(9쪽)

첫 장을 읽자 훅 빠져듭니다. 조짐이 심상치 않은데?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 유력한 용의자도 없는 미제 사건입니다. 신참 형사가 조사 과정에서 손에 칼에 베인 상처가 있는 대학생을 만납니다. 이 놈 수상한데? 근데 그 대학생이 답변을 거부해요. 형이 변호사네, 뭐네. 결국 윽박지르다 용의자를 때리게 되고요. 그때문에 난리가 나고 수사에 혼선이 생깁니다.

세월이 흘러 신참 형사는 강력반 팀장이 되었어요. 자신의 실수 탓에 진범을 놓친게 아닐까 고민하던 팀장이 22년 전 살인사건을 재수사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럼 이 소설은 50대 아재가 된 수사반장이 22년전의 진범을 추적해 젊은 시절의 과오를 청산하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반장과 함께 일하는 어린 형사 연지혜입니다. 살인범의 독백이 소설의 세로축이라면, 가로축은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형사들의 추적기입니다. 

연지혜는 열혈형사예요. 범인을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는 젊은 후배에게 팀장은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라는 충고를 넌지시 건넵니다. 어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슬슬 하라굽쇼?

"범인은 경찰 조직 전체가 함께 잡는 거지, 형사 하나가 잡는 게 아니야. 사건이 나면 신고를 받는 사람이 있고, 현장에 나가서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증거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목격자 찾아다니면서 진술 받는 사람도 있고, 용의자 몽타주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수배 전단을 전국 곳곳에 붙이는 사람도 있어. 그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범인을 잡는 거지."

즉 하나의 시스템인 거죠. 수사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은 더 큰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고, 교도소에서 범인을 가두고 벌을 주는 형사사법시스템. 팀장은 이렇게 말을 이어요.

"그 큰 시스템 전체에서 형사 한 사람의 역할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거지. 이게 우스운 게, 괜찮은 형사의 영향력은 작아. 무능한 형사의 영향력도 크지 않아. 그런데 나쁜 형사의 영향력은 커. 어느 형사가 게을러서 자기 할 일을 안 한다, 이건 시스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지 않아. 뭐, 이 시스템에는 보완 장치들이 있으니까. 그 형사가 증거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거나 목격자 진술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돼. 

그런데 어느 형사가 증거를 조작했다거나 증인을 협박했다면? 그러면 관련 증거를 전부 못 쓰게 돼. 최악의 경우에는 진범을 잡아놓고도 풀어줘야 할 수도 있어.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나쁜 형사에 취약해. 그러니까 이 시스템에 몸담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나쁜 부품이 되면 안 된다는 거야. 차라리 헐렁하고 게으른 게 나아."

(26쪽)

이 대목을 읽고 멍해졌어요. 제가 평소에 하는 생각이거든요. 차라리 글을 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한이 있더라도 나쁜 글을 쓰지는 말자. 이게 제가 2020년 가을에 얻은 깨달음입니다. 그런데요, 열심히 살던 사람은 이걸 실천하는 게 참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요즘 글쓰기나 대외 활동보다는 취미로 하는 운동에 더 열중합니다. 나이 들어 돈이나 권력을 탐하다 나쁜 어른이 되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소설 <재수사> 정말 재밌어요. 1권 409쪽, 2권 405쪽. 방대한 분량인데요. 사흘만에 다 읽어버렸어요. 추석 연휴 동안 천천히 읽으려고 했는데 연휴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버렸어요. 간만에 추리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저만 재미나게 읽은 건 아닌가 봐요. 정유정 소설가님은 이렇게 쓰셨거든요.

'미스터리 독자로서 나는, 종종 이런 소설을 상상한다. 정통 추리 형식을 따르면서도 지적 유희 혹은 사유를 제공하고, 몇 날 며칠 파고들 만한 풍부한 서사에 예상치 못한 반전을 보장하는 소설. 덤으로 개운한 뒷맛까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올여름, 마침내 나는 상상 속의 소설을 만났다.

이 소설이 바로 그 소설이다.'

감히 더 보탤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을, <재수사>와 함께 즐거움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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