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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판타지 소설을 읽는 재미

by 김민식pd 2022. 9. 5.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이야기 산업의 약진이 놀라워요. 영화, 드라마, 소설, 전 부문에 걸쳐 해외에서 호평받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저주 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습니다.

<여자들의 왕> (정보라 / 아작)

호러 단편이 위주였던 <저주토끼>와 SF 소설을 모은 <그녀를 만나다>에 이어 이번에는 여성주의 판타지 작품들을 골라 엮었다고요.

첫 이야기 <높은 탑에 공주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기 어떤 높은 탑 속에 한 공주가 있다. 그리고 그 탑과 안에 든 공주는 사나운 용이 지키고 있다. 용은 불을 뿜고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리하여 한 용감한 기사가 나선다. 기사는 몇 날 며칠을 달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사나운 용이 사는 곳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용의 눈을 피해 높은 탑을 올라가서 공주의 방으로 숨어든다. 공주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 눈부신 하얀 뺨은 탑에 갇힌 해 용에게 시달려서인지 조금 여윈 듯하고, 붉은 입술도 약간은 파리해진 것처럼 보인다. 기사는 아름다운 공주의 잠든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다가 침대 위로 몸을 숙인다. 공주의 귓가에 속삭인다. 공주님, 제가 왔습니다. 공주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입맞춤을 느끼고 공주가 눈을 뜬다.

"뭐야, 너? 여기까지 왜 또 왔어?"

아니 그러니까 공주님, 나쁜 용에게 붙잡혀 이 높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 제가...

"구출 좋아하네. 나가, 당장 나가."'

음, 소설의 전개가 시작부터 좀 엉뚱하지요? 자신을 구하러 온 기사에게 공주는 급기야 칼을 겨눕니다. "말로 할 때 곱게 나가라." 네, 우리가 어릴 적 흔히 읽은 그런 동화가 아니에요. 기사와 공주에게는 사연이 있어요. 어릴 적, 둘은 눈이 맞았는데, 하필 공주는 이웃나라 왕자에게 시집을 가고, 시어머니를 만나는데, 하필 그 분이... 음... 정말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펼쳐져요.

정보라 작가님의 말.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틀에 박힌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꿨다”고요. 남녀의 성역할만 바꿔도 이렇게 기발한 소설이 탄생하는군요. 불을 뿜는 용과, 좀비가 된 왕과, 칼을 휘두르는 공주 등 다양한 주인공이 엎치락덮치락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데요. 

'그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결국 해피 엔딩이다.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종류의 해피 엔딩이 되는지는 끝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본시 이야기라는 건 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91쪽)

반전에 목을 매는 영화는 전개가 지루합니다. 막판에 큰 거 한방을 숨겨놓느라 이야기의 전개가 지지부진하거든요. 정보라 작가님은 과정을 중시합니다. 쫀득쫀득 문장 하나하나가 다 찰지고 재미나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소설집인데요.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의 세 편은 연작 소설입니다. 안데르센 동화를 패러디한 어른들의 잔혹극 같은데, 따스한 판타지로 읽히는 작품도 많아요. 기발한 상상력으로 수놓은 일곱빛깔 무지개같은 소설집. 한국 문학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책입니다.

새로운 작가님을 발굴하는 재미가 있어 독서의 즐거움은 날로 풍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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