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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경청도 선택입니다.

by 김민식pd 2022. 8. 12.

평생 저는 말로 먹고 살았어요. 영업사원, 통역사, 피디, 강연자, 다 말하기와 듣기가 직업에 가장 중요한 특성이지요. 그런데 대화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대화법을 공부하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 있어요.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이진희 / 마일스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해요. 

'가족과의 대화는 빈곤했으며, 직장에서의 대화는 피곤했다. 묵묵히 들었더니 사람들은 나를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자기 감정을 쏟아 부었다. 어지간해선 거절을 하지 않았더니 만만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의 요구에 끌려다니느라 정작 내가 무얼 원하는지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안에 쌓인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부적절한 타이밍에 부적절한 대상에게 부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타인과의 관계도, 나 자신과의 관계도 엉망이었다. 거기서 오는 수많은 감정이 쌓이고 또 쌓였다가 불시에 눈물로 터졌다.'

(9쪽)

저도 그랬어요. 촬영장에서 스태프를 배려하는 좋은 피디가 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는 자기 주장이 없고 카메라 감독에게 휘둘리는 속없는 양반이라 소문이 나더군요. 나는 애사심이 깊은 피디라 어려운 자리도 맡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위에서는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적성에도 안 맞는 노조 부위원장이 되었다고 안타까워 해요. (둘 다 맞는 말이기도... ^^) 아, 참 어려워요. 어떻게 해야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나의 감정을 보살필 수 있을까요?

KBS 라디오 피디로 일하는 책의 저자도 대화가 참 힘들었답니다. 어느 날 '전세계인의 대화법 교과서'라 불리는 '비폭력대화'를 만나고 삶이 변해갑니다. 비폭력대화교육원의 수업을 듣고, 팟캐스트 <대화만점>을 만들어 대화에 대해 고민을 나눕니다.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은 그대로지만, 대화법을 바꾸니 자존감이 높아지고, 제대로 공감하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이가 이제 안심하고 웃으며 산다고요. 그 살가운 변화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쓴 책.  

방송사 피디 시험에 합격한 저자에게 아버지가 묻습니다.

"기계는 엔지니어가 조작하고, 말은 아나운서가 하고, 원고는 작가가 쓸 테고, PD는 뭘 하는 거나?"

그땐 답을 하지 못해 우물쭈물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요. 

"PD는 각각의 역할을 이해하고 방향을 정해서 제때 '부탁'하는 직업이에요."

캬아아! 정확한 표현입니다. '부탁'은 피디에게 필수 능력입니다. 원고 수정도 부탁이고, 방송 시작 큐 사인도 부탁입니다. 그런데요, 부탁했다가 거절 당하면 힘들어요. 캐스팅 제안에 거절을 당하면 피디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든요. 

'거절이 '나'에 대한 거절이라고 생각하면 힘들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상대는 내 존재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한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지금'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이다.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거나 조건과 시기가 달랐다면 대답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또, 나는 부탁하기 위해 오래 고민하고 준비했지만 거절하는 상대는 '방금 처음' 내 부탁을 들었다.' 

(140쪽)

저자는 '거절당했다'라는 표현을 '거절 듣기'로 바꾸어보자고 제안합니다. 당했다는 표현은 피동태고요. 은연중에 거절한 사람을 비난하고 나를 안쓰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가 한 거절을 들었을 뿐이라 생각하면 마음의 온도가 달라지고요. 거절 안에 담긴 상대의 욕구를 읽어내기 위해 거절을 잘 들어볼 수도 있거든요. 

'대부분의 대화법 책이 '대화를 잘하려면 경청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권력이나 감정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다면 이 원칙은 적용되기 어렵다. 더구나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괴롭다'면 그 듣기는 상대의 감정 배설을 받아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 직장 상사, 사랑하는 부모님, 하나뿐인 애인, 자녀와 배우자... 아무리 가깝고 중요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감정 노동을 강요할 순 없다. 

누군가가 지속적이고 일방적으로 공감을 요구한다면 그 대화는 단호하게 멈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청'도 선택이다.'

(146쪽) 

모든 사람에게 다 잘해주는 사람은 자신을 죽이고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삶의 에너지가 넘친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겠지요. 사람들에게 호인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지는 50 이후에는 친구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만나고 나면 왠지 피곤하고 힘든 사람이 있어요. 분명 상대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그 사람에게 이용 당하는 것 같지?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이 정도도 못해줘?'하고 말하는 사람... 내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관계는 피하는 편이 좋아요.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는 폭력이거든요.

관계는 참 어렵고요, 대화도 어려워요. 평생 고민하며 살아야할 주제 같아요.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받는 분이라면, 이 책 권해드립니다. 저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어요.  

경청도 선택이라는 말씀을 곱씹어봅니다. 

 

오늘 하루, 자신을 보살피며 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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