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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플레인 와플이 답이다

by 김민식pd 2022. 6. 29.

손에 잡으면, 하루만에 후닥 다 읽어버리는 책도 있고, 두고 두고 아껴 읽는 책도 있습니다. 이번 책은 후자에요.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순 없어> (정세랑 / 위즈덤하우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얼른 덮었어요. 정세랑 작가님의 여행 에세이인데요. 여행광만큼 여행기를 사랑할 순 없는 거죠. 심지어 저같은 정세랑 작가님의 팬의 입장에서는... 그러다보니, 책을 읽을수록 작가님이 그려내시는 여행지의 풍광이 눈에 선해 미치겠는 거예요. 코로나가 끝나길 기다리며, 조금씩 조금씩 아껴 읽었어요. 

예전에 정세랑 작가님의 <지구에서 한아뿐>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며 저자의 헌사를 인용한 적이 있어요.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 저자는 그 말이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깝다고 하십니다.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난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던 엄마 아빠.

'엄마는 과의 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 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 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예술을 생산하며 간소하면서도 이타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 장기적으로 내가 누렸던 행운들을 갚고 싶다.'

(40쪽)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문장이었어요. 작가의 탄생에 부모님의 문화적 향유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걸 깨달은 창작자는 공동체를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책은 다섯 도시를 여행한 작가님의 에세이인데요.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 다섯 개 챕터로 나눠진 책을 읽는 건 너무 반가운 일이었어요. 뉴욕,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 다 제가 좋아하는 여행지거든요. 우연히 동향 사람을 만났는데 알고보니 공통의 친구가 있었던 거죠. 작가님의 글을 통해 만나는 도시들의 근황도 반갑네요.  

특히 반가운 도시는 제가 1992년 배낭 여행 때 다녀온 벨기에의 브뤼헤였어요. 

'브뤼헤는 브뤼셀에서 9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다. 책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가져간 여행책에는 브뤼헤가 고작 두 페이지로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압도적인 풍경을 감안하면 그보다 길고 자세한 페이지를 나눠 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브뤼헤는 베네치아와 자주 비교되는 도시라고 한다. 중세의 건축과 근세의 건축이 발걸음마다 시간 차를 만들고 그 사이를 수로가 촘촘하게 흘렀다. 1600 몇 년에 지어졌다고 사람으로 치면 이마쯤에 숫자를 새긴 건물들에 감탄하면서 걷다가, 비어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앉았다. 귀여운 용 두 마리가 좌판을 받치고 있는 벤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207쪽)

 

책을 읽다보니, 1992년, 브뤼헤의 운하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 다시 가고 싶네요. 대학 4학년 여름방학,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별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취업이 안 되어 너무 힘들던 시절... ^^) 브뤼헤의 운하, 그 공간으로 돌아갈 순 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92년도 유럽 배낭했던 한 달 반의 일정을 그대로 다시 따라가 보고 싶네요. 20대의 내 발자취를 따라...  

벨기에는 와플의 고향이죠. 정세랑 작가는 유명한 와플 맛집을 찾아가 플레인 와플 하나와 온갖 토핑을 얹은 와플 하나를 시키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레인 와플이 훨씬 맛있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플레인 와플을 시켜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책의 모든 내용을 잊고 '벨기에에선 플레인 와플'만 기억해준다 해도 나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196쪽)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어 힘들 때, 이 책을 읽으며 간접체험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느꼈어요.

언젠가는 벨기에에 플레인 와플 먹으러 꼭 가고 싶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정세랑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권해드립니다.

여행의 즐거움이나 정세랑 작가를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특히 이 책을 추천합니다.

삶의 새로운 행복 하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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