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살면서 가장 두려운 일은?

by 김민식pd 2022. 6. 17.

소설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다가 일어나보니, 옆에 처음 보는 여자가 누워있어요. 그런데 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밤새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참 난감한 상황이지요. 그런데 소설은 갈수록 이 남자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줍니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정아은 / 문예출판사)
주인공 김지성은 쉰네살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아내와는 별거중인데요. 어느날 눈을 떠보니 어떤 여자가 침대에 같이 누워있어요. 도대체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데 이 분, 술먹고 필름이 끊기는 게 처음이 아닌가봐요.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온 여성 시인 민주가 그를 찾아와 그래요. "그날 일, 생각 안 나? 완력을 썼어." 완력을 썼다니, 둘이 만났을 때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적이 있는데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인은 주인공을 상대로 ‘미투’ 고발을 하고는 세상을 떠납니다. 순식간에 그는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의 가해자가 됩니다. 대학 강의도 없어지고, 라디오 진행 일도 날아가고,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그를 향한 조롱과 비난이 빗발치죠.
'자살하고 싶지 않느냐, 내가 너라면 그냥 깨끗이 간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은 절멸시켜야 한다, 화형제도를 부활시켜서 김지성 같은 새끼들 싸그리 태워버려야 한다, 등등 극단적이고 가차 없고 창의적인 댓글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215쪽)
문학평론가로 평생을 글을 쓰며 살아왔기에, 그는 책을 써서 다시 대중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호소하려 합니다. 하지만 칼럼을 연재하던 신문사는 연재 중단을 알려오고, 출판사에서는 작가의 메일에 답도 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글이 마렵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드라마틱한 추락을 언어로 형상화하고 싶었다. 사회가 얼마나 매정하게 자신을 버렸는지, 자신이 얼마나 추한 분노와 동료 문인들에 대한 질투심에 시달리는지, 정교하게 언어로 빚어내고 싶었다. 누구도 실어주지 않을 걸 아는데도, 누구도 읽어주지 않을 걸 아는데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존재의 모든 측면을 정당화하며 살아온 자는, 더 이상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밥을 벌고 무엇으로 허허벌판 같은 생을 채워가야 하는가? 그는 자신에게 있는 글쓰기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문학에 대한 열망이 지긋지긋했다.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왜 재능은 사라지지 않는가. 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는가.'
(261쪽)

저 역시 재능은 없지만, 늘 열망이 있어요. 로맨틱 코미디를 잘 만들 자신은 없지만, 만드는 과정을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늘 있었지요. 하지만 7년 넘게 드라마 연출에서 배제되면서 더이상 피디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책을 읽었고요. 독서는 블로그 리뷰로 이어졌어요. 그나마 블로그 독자들을 만나는 낙으로 그 힘든 시절을 버텼던 것 같아요. 문학평론가인 주인공도 책을 읽습니다.
'독서가 쌓이면 결국 글로 표출되어 나오기 마련인데, 그에게는 글쓰기만큼 소용없는 짓이 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지만, 김지성이라는 인물만은 글을 쓰면 안 됐다. 그렇다고 유일한 독자인 자신만을 위해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지성은 글쓰기가 철저히 사회적인 행위라는 것을 인식했다. 읽어주는 타인을 상정한 상호 교류 활동이라는 것을. 정작 작가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쓸 땐 얻지 못했던 깨달음이 더 이상 작가로 존재할 수 없게 된 후에야 명징한 의미를 지니고 물결쳐왔다.'
(286쪽
소설을 읽는 내내,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이 나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미투는 피해자의 자살과, 이어지는 피해자 가족의 등장, 그리고... 아, 정말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지는데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차마 쓰지는 못하겠네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없이 반전이 이어집니다.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함께 쓰신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도 얼른 읽어야 하는데!
오늘의 질문 : 인생이 망했을 땐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자.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 더 나은 것을 생각하자.'
(379쪽)
어차피 세상의 평가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둬야해요.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고 싶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