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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지치지 않는 로봇이 필요해

by 김민식pd 2022. 8. 5.

7월 중순에 코로나에 걸려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동안 한번도 걸린 적이 없어 '백신 덕분에 그냥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만만한 바이러스는 아닌가 봅니다. 열도 나고, 기침도 나고, 가래도 나오고, 무엇보다 어지럼증과 두통이 심해 혼났습니다. 약 2주 동안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반복했어요. 처음 양성 문자를 보고 '음, 자가격리 시간 동안 밀린 책이나 실컷 읽지 뭐.' 했거든요. 착각이었지요. 2주 동안 책 한 줄 못 읽었어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책은 읽었는데요. 머리가 아프고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니 그냥 누워서 계속 약을 먹고 잠만 청하게 되더라고요. 독서도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만 할 수 있는 활동이란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제일 에너지가 덜 드는 일이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SNS에 올라온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일이었어요. 2주일 가까이 페북을 매일 들여다보다 느낀 점... 인간사는 희망과 절망 사이 두가지 극단을 오갑니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사진과 글도 있지만, 읽는 이에게 절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소식도 많거든요. 그때 장강명 작가님의 페이스북에서 <다리 위 차차> 북토크 소식을 접했어요. 주문 하루만에 택배로 도착한 책을 펴니 장강명 작가님의 추천사가 나오네요.

'인간성은 감동적이다. 우리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무익한 아름다움에 기뻐하고, 약자를 위해 눈물 흘리며, 계산 없이 희생한다. 인간성은 추악하다. 우리는 끝없이 착취하고 즐겁게 조롱하고 기꺼이 고문하며 거대하게 기만하고 마침내 살육한다. 인간성은 부조리하다. 거기에 희망을 품어야 할지 절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을 사랑하는 분들, 그러면서 진절머리를 내는 분들, 사람에 실망하고, 그럼에도 사람을 떠날 수 없는 분들, 인간성이라는 수수께끼에 사로잡힌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와,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는 작가는 나 개인의 고민까지 훤히 뚫어보고 계시는군요.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심정으로 책을 펼쳤어요. 

<다리 위 차차> (글 윤필 / 그림 재수 / 송송책방)

이 책은 2019 SF어워드 대상 수상작입니다. 2018년에 웹툰에서 연재되었고요. 뒤늦게 책으로 나왔어요. 시간 배경은 근미래. 자살자가 증가하자 국가적 차원의 자살 방지 프로그램이 가동됩니다. 프로그램에는 인간 대신 로봇이 투입됩니다. 로봇은 대상자의 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죠. 24시간 다리 위에 상주하며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을 무사히 되돌려 보내는 것이 로봇 차차의 일입니다. 도입 초기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는데, 자살률은 줄지 않았어요. 결국 도시가 쇠락하며 방치되고 차차는 혼자 다리 위에 남았어요.  

윤필 작가님은 마포대교에 있는 자살방지 문구를 보고 차차의 아이디어를 떠올리셨다고 했어요. 만약 전문 상담가가 24시간 상주하며 자살을 막는다면? 사람이 있으면 부담스러워 다른 장소를 택하겠지만, 그냥 로봇이 있다면? 부담없이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로봇도 자살률을 줄이지 못하자 결국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로봇을 방치한다면?

"자살방지는 효율이 아니라 효과의 문제입니다."

라는 윤필 작가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어도 그 효과는 위대한 것이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효율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포대교의 문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군가는 다리를 찾아왔다가 그 글귀를 보고 마음을 돌이키기도 하겠지요.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아 돌아간 사람은 기록에 남지 않아요. 뉴스에 나오는 건 문구가 막지 못한 사람의 소식이지요. 그런 뉴스를 보고, '마포대교 문구도 별 효과가 없네.'라고 하는 건 섣부른 속단이 아닐까요?

자살 방지를 위해 전화 상담하시는 분들을 생각해봅니다. 정말 고귀한 일을 하시는데요. 너무 힘드실까봐 걱정입니다. 사람이 죽을 결심을 한다는 건 그만큼 세상을 절망적이라 본다는 건데, 그런 분들이 살면서 겪은 일들을 계속 듣다보면 지치지 않을까요? 모쪼록 지치지 않고 희망을 이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책에는 자동화된 매장이 나옵니다. 자동화된 무인 스크린으로 주문을 받고, 로봇이 음식을 만들어 서빙하는 매장.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심지어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면? 내가 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봇이 일하는 매장에서 유일하게 점장만이 사람입니다. 무인 주문기가 오류가 나거나, 로봇이 서빙하는 동안 실수로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이 불같이 화를 내는데요. 달려가서 사과하는 게 점장의 역할입니다. 로봇에게 화를 내거나, 무인 주문기를 발로 걷어찰 수는 없으니 손님들이 분노를 쏟아낼 사람을 찾습니다. 마치 알바생에게 화를 내는 진상 손님 같네요.

"여기 사장 누구야? 사장 나오라 그래!" '

미래에는 로봇이 생산을 담당하고, 분노한 고객들의 화를 풀어주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서글퍼지네요.  

인간형 요양로봇 '아이 AI'가 2권 표지 인물인데요. 정말 헌신적으로 주인의 노후를 돌보는 로봇입니다. 요양사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운 노인이라도 로봇은 감정의 소모 없이 묵묵히 주인을 돌봅니다. 가까운 미래에 고령화와 저출생이라는 양대 압박은 노동력 감소로 이어집니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차지할 것을 걱정하기보다, 로봇이 노동인구를 대체해준 덕분에 현재의 생산성과 복지 서비스,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로 아파 누워있는 동안, 딸들의 도움은 물리치고 혼자 끙끙 앓으며 버텼어요. 나도 이렇게 아픈데, 아이들까지 아프게 할 수는 없잖아요. 오래 사는 게 꿈인데요. 너무 오래 살면, 딸들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입니다. 차라리 지치지 않는 로봇에게 노후의 돌봄을 맡기고 싶네요.

 

<다리 위 차차>, 서점에 있어요.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시면 참 좋을 만화입니다.

SF어워드 대상을 받을만한 작품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실 겁니다. 

여름방학은 차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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