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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by 김민식pd 2022. 10. 31.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어요. 2007년 시카고 경매장을 찾은 존 말루프는 창고에 방치된 물건을 경매로 삽니다. 한 상자에서 네거티브 필름 10만통을 발견해요. 그중 수만 장의 사진은 현상조차 되어 있지 않아 그저 필름 상태로만 남아 있어요. 카메라가 귀했던 1950년대의 기록이 가득한데요. 사진에 대한 조예가 깊은 말루프는 자신이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는 걸 직감합니다. 그가 온라인에 올린 몇 장의 사진들은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요. 다들 그 사진을 찍은 비비안 마이어가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20세기 위대한 거리 사진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비비안 마이어, 그의 정체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입니다.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 보모로 일하며, 일하는 짬짬이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아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남의 집살이를 합니다. 노후에는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도 아니었어요. 필름을 현상할 돈조차 부족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는 평생 카메라를 놓지 않았을까? 호기심이 저를 책으로 이끌었어요.

<비비안 마이어> (앤 마크스 지음, 김소정 옮김, BOOKHOUSE)

비비안 마이어의 가족 계보와 일생을 추적한 책입니다. 마이어는 10대 시절부터 경제적 독립을 추구합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가난한 10대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거죠. 적어도 먹고 사는 건 해결되니까요. 남의 집 아기를 돌보는 보모 비비안 마이어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어요. 바로 자신의 가족사입니다. 

비비안 마이어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애정을 주지 않아요. 일하는 딸을 찾아와 수시로 돈을 뜯어갑니다. 아버지는 폭력적인 알코올중독자에요. 거기에 마약에 중독되고 조현병을 앓고 있는 오빠까지 있어요. 정신병력이 역력한 집안에서 자란 비비안 마이어. 자신의 가족사가 알려지면 아기를 돌봐주는 일을 얻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보모에게 필요한 건 아기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일이니까요. 비비안은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자신의 성장사에 대해 철저하게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은둔하며 살아요. 


가족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었기에, 그 자신 평생 가족을 이루지도 않아요. 불필요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오래가는 친구를 만들지도 않아요. 평생 외롭게 살던 그가 세상과 대화하는 창구로 선택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어요. 그는 길거리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표정을 찍습니다. 일상의 찰나를 포착해낸 놀라운 사진들이 정말 많아요. 구글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이미지 검색으로 찾아보셔도 좋아요.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사람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 감성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찍었다는 게 아이러니지요. 사연을 알고나면 이해가 됩니다. 아, 사진이 비비안 마이어에게는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유일한 탈출구였구나.

비비안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어요. 삶에서 가장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세계일주.


'1959년에 비비안은 (자신이 보모로 일하던) 겐스버그 가족에게 세상을 돌아보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6개월 동안 떠나 있겠다고 말한다. 호기심과 배짱, 독립심이 두둑한 비비안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화물선인 플래전트빌호를 타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을 탐험했다. 필리핀,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예멘, 이집트, 이탈리아가 기항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마주친 모든 아이를,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모든 그림을 사진에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비안은 자신이 세계 여행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했는데, 그것은 세계 여행이 비비안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314쪽)


세계일주를 다니며, 다양한 풍경과 인물 사진을 찍습니다. 20대의 비비안에게는 전문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최신 기종의 카메라를 사고, 열심히 고난이도의 사진 기법을 익힙니다. 하지만 결국 좌절합니다. 세상은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지 않아요. 여러차례 전문 사진가의 세계에 입성하기를 시도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꿈이 좌절했으니 남은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할까요? 아닙니다. 그는 사진 애호가의 삶을 선택합니다. 세상이 알아주건 말건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지만,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출사를 다녀요.

저는 비비안 마이어가 비록 무명의 사진작가이었을망정,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행복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수십만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거죠. 과거는 불행하고, 미래는 불안해도, 현재의 일상을 지키는 소중한 루틴이 있다면 사람은 버틸 수 있어요. 비비안의 아빠는 알코올로, 오빠는 마약 중독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데요. 사진에 중독된 비비안은 장수합니다. 그녀는 끝내 살아남아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요.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비안에 관한 가장 강력한 신화는 그녀가 소외됐고, 불행했고, 무엇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비비안은 끝내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엉망이 된 가족과 과감히 절연하고 자기 삶의 질을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린 불굴의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비비안은 끈질긴 회복력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았다.'

(24쪽)

사진이 비비안을 지켜준 일상의 루틴이라면, 제게는 독서와 여행, 글쓰기가 그렇습니다. 요즘은 운동이 추가되었지요. 여러분을 지켜주는 루틴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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