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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행복은 덧셈일까, 뺄셈일까

by 김민식pd 2022. 12. 26.

<완전한 행복> (정유정 장편소설 / 은행나무)을 읽었습니다.

음... 처음에는 좀 무서웠는데요. 갈수록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역시 정유정 작가님 특유의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네요. 책을 읽다 혼자 씩 웃었던 대목이 있어요. 영화를 보고 바이칼 호수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두 남자. 여행 계획을 짜는 사이, 만국의 여행자들이 예외 없이 앓는다는 '기왕병'에 걸립니다.

'기왕 가는 거, 러시아 최남단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자고 했다. 3박 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면 이르쿠츠크라는 도시에 도착하고, 바이칼 호수는 거기에서 금방이라고 했다. 다음날엔 기왕 횡단 열차를 타는 거, 전 구간을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날엔 기왕 나선 거, 바이칼 호수에서 몽골로 넘어가자고 제안했다. 다음다음날엔 고비사막 트래킹도 추가하자고 꼬드겼다. 며칠 더 지나면 영화의 주인공들이 간 길을 모조리 밟아볼 기세였다. 그는 최종목적지를 횡단 열차 종착역으로 못 박았다.
"모스크바까지만 가."'

ㅋㅋㅋㅋㅋ 이 대목을 읽으며, 완전 공감했어요. 저도 한때 기왕병에 걸려서 참 힘들었지요. 기왕에 거기까지 가는 거... 하다가 자꾸자꾸 가봐야 할 곳이 늘어나고요. 갈 곳이 너무 많아지면 정작 가서 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이동하느라 날샙니다. 게다가 중간에 한번 일정이 틀어지면 피곤해지지요.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욕심을 줄여야해요. 기왕에 간 김에 싹 다 보겠다, 라고 마음먹기 보다, 딱 몇개만 정해놓고 온전하게 즐기고 오겠다라고... 여행의 행복은 선택과 집중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아, 인생의 행복도 그렇던가요?

한 남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서른네 살이나 된 남자가, 그것도 전처의 재혼 소식에 화병이 났던 쪼잔한 이혼남이, 옆집 소녀에게 반한 열네 살 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옳았다. 어머니가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데 20년이 필요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덴 20분이면 충분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남자는 이렇게 대답해요.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여자는 아니라고 말해요.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결혼한다면 한 팀이 되는 건데 자기도 내게 맞춰 노력할 수 있어?"

사랑에 빠진 남자는 "할 수 있어."라고 냉큼 대답하지만, 소설을 읽는 저는 이 대목에서 가슴 한 켠이 싸해오네요.... 행복에 대한 둘의 입장차가 너무 다르거든요. 행복이 덧셈이라고 믿는 사람은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사람이에요. 사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쌓여 인생의 행복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죠. 뺄셈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완전한 행복을 믿는 사람이에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고, 그걸 다 이루어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지요. 이 둘의 결혼생활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노력으로 극복가능한 지점일까요?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 작가님은 이렇게 쓰십니다.


'이 소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 '노력'한 어느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다. 다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을 떠날 때, 최선을 다해 계획을 짜지만, 낯선 타국에서의 일정이 절대 내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압니다. 온전한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여행자의 도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여행은 없어요.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완전한 행복은 없지만,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읽는 순간은 행복입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매일 더해갑니다. 행복은 덧셈이라고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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