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남과 싸우는 사람 vs 나와 싸우는 사람

by 김민식pd 2022. 6. 27.

<모태 솔로를 만나다> 제3화, 지난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2편을 보고 오셔도 좋아요.

https://free2world.tistory.com/2814


청년에게 물었어요. 
"『삼국지』에 나오는 사람 중 누구를 제일 좋아해요?"
"음, 관우나 조운이요?"
"관운장과 조자룡, 둘 다 멋있는 장수죠. 일당백으로 적들을 쳐부수고, 적장도 단 칼 에 베어버리고. 나도 어릴 땐 그 둘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유비가 더 좋아요."
"유현덕은 약하지 않나요? 싸움도 잘 못하고……"
"관우나 장비에 비하면 매력이 떨어지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관우나 장비는 남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지만, 유비는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더라고요. 관우나 장비처럼 늘 남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자만심 탓에 비극적 최후를 맞기도 해요.  유비는 다르죠. 남과 싸우지 않아요. 자신과 싸우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기에 주위에는 늘 인재들이 몰려들죠. 노년에 황상의 자리에 오르고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는 유비의 행복한 말년도 다 이유가 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청년이 묻습니다.
"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이건가요?"
"유비가 젊었을 때 겪은 일화가 있어요. 늦가을에 고향 가는 길에 차가운 개울을 만나 바지를 걷고 힘들게 강을 건넙니다. 물에서 나와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불러 자신을 업고 반대편으로 건너 달라고 합니다. 유비가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넜더니 노인이 냅다 화를 냅니다. 보따리를 두고 왔으니 다시 건너라고요. 유비는 말없이 다시 업고 건넙니다. 노인이 묻지요. “처음에 한 번 건너준 건 이해가 간다. 그런데 왜 두 번째도 말없이 건넜느냐?” 그때 유비가 한 말 알아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요.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오, 정확해요!"
청년이 씨익 웃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땐, 책이라도 읽어야지요."
"노인이 다시 건너자고 했을 때, 유비가 화를 내며, ‘아니 뭐 이런 노인이 다  있어?’ 하고 팽개쳤다면 처음 강을 건넌 수고마저 사라지는 셈입니다. 그러나 말없이 한 번 더 건너면 앞서 겪은 노력의 가치가 배가 되죠. 힘든 일을 한 번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없이 두 번 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 차이가 유비를 영웅으로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청년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런가요?"
"사는 게 싸움이라고 생각해봐요. 나와 세상의 싸움.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사는 건 지는 거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사는 건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죠. 저는 매일 지고 살아왔지만요."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래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살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학원도 다니고 독서실도 다니고 과외도 받고, 그렇게 고생을 해서 대학에 들어갑니다. 이제껏 공부는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한 일이에요. 부모가 시키고, 선생이 시키니까. 여기까지는 유비가 노인을 업고 강을 한 번 건넌 겁니다. 20대가 되고 꿈이 생깁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겨요. 근데 보니까 또 공부를 해야 해요. 공무원 시험이건, 공채 준비건, 자격증  시험이건, 공부를 또 해야 하는데요. 공부가 지겹다고, 안 하잖아요? 그럼 어려서 공부한 수고까지 날아갑니다.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를 생각하면,  스무 살 이후의 공부는 학창시절 노력한 것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합친 것 이상의  보상을 줍니다. 진짜 공부할 맛이 난다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어려서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영어 공부를 했어요. 영어 공부라면 학을 뗐어요."
"아! 저도 영어는 별로……"
"덕분에 대학 가서는 영어 공부 안 했죠. 2학년 1학기 영어 성적이 D+였어요. 그러다 입대를 하고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니 다들 특기가 있냐고 묻더군요. 운전을 잘하면 수송대 운전병, 타자를 잘 치면 행정병, 영어를 잘하면 통역병으로 보냈어요. 특기가 있으면 선택지가 생기는데, 아무런 특기가 없는 사람은 그냥 몸으로 때워야 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영어 공부를 시켰을 때, 열심히 했다면 고생을 안 했겠구나. 언젠가 이런 후회를 또 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취업하다 안 되면, ‘아, 그때 영어 공부라도 좀 해둘 걸’ 또 후회하느니 이제라도 공부하자 싶었죠. 이번에는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마음먹고서."
청년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영어 공부라는 게."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세상이 시키는 일도 안 하잖아요? 그건 그냥 게으른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았다는 핑계로 현실도피 하는 거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내 인생에 대한 예의는 아니잖아요?"
청년이 마른 침을 삼킵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에, 아니…… 작가님은 영어 공부 덕을 보긴 하신 거예요?"

청년에게 방금 전 책장에서 찾아낸 잡지 『영어 세계』를 내밀었어요. 1990년에 저는 고향에서 방위병으로 일하고 있었죠. 학원도 없고, 영어 과외를 받을 길도 없던 시절입니다. 혼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긴 하는데, 실력이 느는 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때 도서관에서 『영어 세계』라는 잡지를 봤습니다.


잡지에는 ‘독자가 참여하는 번역교실’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매월 외국 잡지에서 영문 기사 하나를 게재하고 독자더러 직접 번역한 원고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잡지에서 대학 동기의 이름을 봤어요.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애를 채간 얄미운 녀석이었죠. 그 녀석이 번역 응모했다가 우수상에 해당하는 B급 번역으로 이름을 올린 걸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여기 응모해볼까? 그래서 내가 A급을 받으면, 적어도 번역에서는 이 녀석을 누르는 게 되지 않을까? 연애는 밀려도 영어까지 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한 달 동안 퇴근하고 번역 과제를 붙들고 작업했습니다. 시간을 더 많이 들일수록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자세로 밤늦도록 문장을 다듬었죠. 그리고……



몇 달 후, 나온 잡지에서 내 이름 ‘김민식(경남 울산시 남구)’이 실려 있었습니다. 60명이 응모했는데, 그중 최우수상에 해당하는 A급 번역! 청년은 잡지를 들고 신기한 표정으로 들여다봤어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