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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부족한 건 시간이다

by 김민식pd 2022. 6. 13.

(예전에 도서관 지하에 있는 탁구장에서 80대 노인을 만난 적이 있죠.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픽션의 형식을 빌어온 자기계발 에세이입니다.)

제2화 모태솔로를 만나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하면 미팅에서 여자친구를 만나 신나게 연애를 할 줄 알았는데요. 소개팅이며 과팅이며 나갈 때마다 차였어요. 스무번 연속으로 차이고 연애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죠. 1989년 방위병 근무할 때, 저는 통신대 소속 전화 교환병이었습니다. 교환대에 불이 반짝이면 잭을 연결하죠. 
“통신보안! 가야성입니다!” 
“나, 군수 장교인데, 정문 위병소 바꿔줘.”
“네, 충성!”
자정이 지나면 통화량이 거의 없어 야간 근무는 한가합니다. 심야에 혼자 교환대를 지키며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혼자 짝사랑하던 여학생들의 얼굴이 주루룩 스쳐지나갔어요. 아, 사람의 마음을 얻기는 왜 그리 어려울까요? 내가 그렇게 외모나 조건이 부족한 걸까요? 
‘아, 또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럴 때면 영어 문장 쪽지를 꺼내 보았죠. 출근하기 전, 쪽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영어 회화를 적었거든요. 군복 소매 안에 숨겨놓고 틈날 때마다 문장을 외웠습니다. 남들은 야간 불침번을 서면 지루해서 꾸벅꾸벅 졸다가 걸려서 혼나는데, 저는 번뇌가 치밀 때마다 회화 암송하느라 늘 깨어 있으니 근무 자세가 훌륭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습니다.
근무를 쉬는 주말이면 집에 계신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 갔어요. 인터넷도 없고, 영어 자료도 없던 시절이지만, 도서관에 가면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영문 잡지가 있었죠. 『타임』지는 번역 공부하기 참 좋은 교재였어요. 다만 눈으로 대충 읽고 넘어가면, 공부가 잘 되지 않아요. 공부란,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 지나가면 제대로 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죠. 번역을 해보고,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을 해야 해요. 타임지 한 권을 술술 읽고 지나가기보다, 기사 하나만 집중적으로 읽고 번역을 하며 손으로 적었어요.

도서관 복사실에 가서 사설을 한 장 복사하고요. 방위병 근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사전을 갖다놓고 직접 번역을 해봤어요. 1주일 뒤, 『타임』 한국판이 나오면 도서관에 달려가 내가 한 번역과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해봤어요. 틀린 번역을 찾아내어 고치다, 가끔 잡지에도 번역 실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전문가가 한 번역에서 실수가 나오는 건, 실력 탓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한 탓이죠. 마감이 촉박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니 그런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이가 전문 번역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작업한다면, 꽤 근사한 결과물을 낼 수도 있다는 거죠.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시간이 부족한 거구나! 시간만 충분히 쓰면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어요. 그때부터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에 드는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30분 걸린 번역과 1시간을 들여 한 결과물이 확연하게 달랐어요. 그 다음부터는 일단 30분 동안 초벌번역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에 20분간 1차 수정, 그 다음날 아침에 10분간 최종 퇴고를 했습니다.

어떤 일의 정성적인 계측이 힘들 때, 투입하는 시간을 기록을 통해 정량적인 계측을 시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책을 많이 읽었어, 라고 하는 것보다, 읽은 책에서 좋은 글귀를 기록하고 느낌을 남깁니다. 꾸준한 양적인 축적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렇게 번역 연습을 계속했어요. 몇달 동안 학습 시간을 기록한 노트를 보며, ‘그래, 이 정도 시간을 들였으면 좀 늘었을 거야’ 하는 자신감이 생겼고, 6개월 정도가 되자 기사 한 편 초벌 번역하는 데 드는 시간이 처음보다 줄어드는 게 확실하게 보였다죠. 역시 양적 팽창은 질적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20대의 저는 힘들 때,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정량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시절, 시간을 투자한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어 돌아왔어요. '왜 여자들은 나를 만나주지 않는 걸까?' 그 질문을 반복하면 자괴감만 쌓여갑니다. 고민과 번뇌에 시간을 쓰는 대신, 영어 공부에 시간을 썼구요. 그 덕분에 저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물론 영어 공부를 한다고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요, 적어도 나를 미워하는 시간에 다른 무언가에 집중할 수는 있더군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매주 월요일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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