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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시간여행을 꿈꾸는 이유

by 김민식pd 2022. 4. 4.

('짠돌이 노후 수업'은 매주 월요일에 올리는 소설 형식의 자기계발 에세이입니다. 탁구장에서 만난 노인과의 대화, 4번째 글을 올립니다.)

80노인이 된 나를 불러내어, 그가 나이 50의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를 찾아간다면,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까요? 

"제가요. 어려서 부족한 외모 탓에 콤플렉스가 심했거든요. 그런데 살다 보니 별 일 이 다 있더라고요. 나이 오십이 넘어 유튜브 출연 제의까지 받았습니다. 제가 MBC  피디인데 CBS 피디가 연락해서 출연을 해달라는 거예요."

"타방송사 피디를 섭외하다니 그 피디도 과감했네."

"처음엔 이 양반이 장난치나? 했어요. 저도 피디지만, 저같이 생긴 사람은 카메라 뒤에서 큐를 주는 게 어울리지, 카메라 앞에서 큐 받고 출연하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노인이 웃습니다.

"자네에겐 외모가 문제였단 거지? 허허."


"저도 피딘 걸요. 근데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제작진이 저를 상대로 피칭까지 했어요. ‘왜 우리는 김민식 피디를 책 소개 유튜브 채널의 진행자로 선택했는가?’ SWOT 분석이라고, 강점, 약점 분석을 다 했더라고요. 일단 외모가 별로다, 유튜브를 즐겨 보는 젊은 층에게 인지도가 거의 없다, 심지어 목소리도 별로다, 하고 제 약점을 조목조목 짚더라고요."


"제대로 봤네, 그려."


"아니, 어르신.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도 너무 대놓고 인정하시면…… 하여튼 그걸 보고 이 사람들이랑 같이 일해야겠다 싶었죠."

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물으십니다. "왜?"

그런데 왜 꼭 답을 알면서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이 사람들이 나의 외모가 약점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제게 출연 제의를 했잖아요? 그렇다면 그 약점을 커버할 전략까지 다 세웠다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방송하면서 알았어요. 최대한 제 얼굴을 가려줍니다. 책 내용으로 화면을 덮기도 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현란한 CG도 활용하고요."


"젊은 피디들이 편집하느라 참 고생 많았겠어. 생각해보면 좀 미안해지네, 그랴."

"어르신이 왜요?"


"나도 소싯적에 외모 때문에 고민이 많았단 말이지. 잘났니 못났니 해봤자 그거 다 20~30대 얘기야. 늙어보이 그게 다 헛거더라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잘나봤자 젊을 때 잠깐이지요."


"20대에 외모 덕을 본 사람은 늙어서 주름이 느는 게 괴로움일 테지만, 우리처럼 가난한 외모를 타고 난 사람은 나이 들어도 아쉬울 게 없지."

 

"이야, 어르신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자네 너무 대놓고 인정하는 거 아닌가?"


"아이고, 어르신과 너무 잘 통해서 제가 초면에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


"농담을 다큐로 받으면 어쩌란 거야, 하하. 편해졌다니 궁금해지는군. 자네는 꿈이  뭔가?"


"꿈이요? 누가 그렇게 물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네요. 글쎄요, 꿈이랄 건 딱히 없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시간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스무 살 시절의 나를 찾아가고 싶어요."


"왜 하필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건가?"


"그 시절 저는 돈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무척 우울했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위로해주고 싶어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좋아하는 책 열심히 읽고 목표한 영어 공부 꼭 하라고요."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언론 장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이 개봉했을 때 일이에요. 전철을 타고 책을 읽으며 가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세 분이 벌떡 일어나 내게로 왔습니다. 
“어머! 영화에 나온 그분 맞죠? 선생님 나오신 장면, 정말 멋있었어요. 우리 셋 다 팬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시더니 다음 역에서 내리시더군요. 문제는 그 후 지하철 분위기입니다다. 정말 썰렁했어요. 저렇게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온다고? 심지어 멋있는 역할로? 그게 말이 돼? 이런 시선으로 사람들이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살면서 멋있다는 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이 얘기를 스무 살의 나에게 해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제가 영화에 나온다고요? 사람을 놀려도 너무 심한 것 아니십니까?"

노인이 정색하시더니 말씀하십니다.

"선생이 나이 오십에 깨달은 걸 20대의 자신에게 알려준들 도움이 될까요? 그냥 이상한 꼰대가 와서 잔소리하는 걸로 들리지 않겠소? 그냥 두세요. 스무 살의 청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았으니까 지금의 선생이 된 거죠."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여든 살의 나를 만나보고 싶어요."

  
"그건 또 왜?"

"제가요,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까 좋은 시절이 다 끝난 것 같아요. 드라마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창작자로서 전성기가 지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입니다. 100세 시대라는데, 나이 오십에 벌써 전성기가 지났다는 건 너무 우울하잖아요? 80대의 나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어요. 50대에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문득 노인께서는 이 질문에 뭐라 답해주실지 궁금해집니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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