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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초보의 3대 자세

by 김민식pd 2022. 3. 14.

(탁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과 나누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1편을 못 보신 분은 보고 오셔도 좋고, 그냥 읽어도 괜찮아요.)

https://free2world.tistory.com/2761

 

인생은 복식 경기

(공짜로 즐기는 세상의 새 연재물 <짠돌이 노후 수업>입니다. 픽션 형식의 자기계발 에세이인데요. 새로운 형식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즐겁게 써볼게요~^^) 제 1화 탁구의 신을 찾아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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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께서 제게 묻습니다.

"그래서 탁구장은 어디를 다녀요?"

"집에서 가까운 동네 탁구장이요."

"분위기는 좋아요?"

"처음 갔을 때는 좀 힘들었어요. 어떤 분이 오시더니 다짜고짜 일반 회원은 안 되니까 나가라는 거예요. 영업하는 곳에서 왜 손님을 내쫓나? 의아했어요. 그 분은 탁구장 주인도 아니고, 그냥 그곳에서 운동하던 분이었거든요."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구먼. 운동하는 곳에는 텃세가 있지. 공간에 대한 배타적 사용권을 돈으로 지불하거든. 스키장이든 골프장이든, 어떤 운동을 한다는 건, 그 장소에 대한 독점적 이용권을 획득하는 거니까. 초보가 와서 공간을 나눠쓰는 걸 반기지 않지."

"가기 전에 미리 탁구장에 문의를 했죠. 주말에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하냐고. 일회비 7000원을 내고 치면 된다기에 안내해준 계좌로 송금까지 했거든요. 그런데 가자마자 나가라고 하니 황당했어요."

"기분이 좀 나빴겠네."

"제가 그 전에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했거든요. 조직에서 여러차례 업무 배제를 겪고, 부서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아 겉돌았는데요. 퇴직하고 운동하러 간 곳에서조차 따돌림을 당하니 너무 서럽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냥 버텼죠, 뭐."

저는 서른 살에 예능 피디로 입사해, 나이 마흔에 드라마 피디로 이직했습니다. 그때 드라마국 젊은 피디들은 저의 발령을 반기지 않았어요. 자신들의 연출 기회가 줄어들까봐. 그들은 국장실에 단체로 항의 방문을 가서 나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받을 거라면 조연출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했죠. 회식 자리에서 내 연출 스타일에 대해 비웃으며 놀다가 제게 걸린 적도 있는데요.  어떤 후배가 그랬어요. "그래서 형이 드라마를 알아요?" 기득권 세력의 텃세에 굴욕감을 느끼지만 그냥 참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거고, 나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거다. 더 멋있는 삶의 자세는 후자다.' 라며 정신승리로 버텼습니다. 어쩌겠어요.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은 내가 참아야지. 탁구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박이 싫다고 그만두면 나만 손해인걸요.

은퇴에 대한 책을 보면 이런 조언이 있습니다. '현역 시절, 당신이 누리던 지위는 잊어라.' 저는 MBC 피디로 24년을 일했습니다. 촬영장에서는 감독님이라 대접 받고, 밖에서도 깍듯하게 작가님이라고 예우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니 직함과 경력은 사라지더군요. 탁구장에서 저는 랠리도 할 줄 모르는 초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탁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100세 인생 시대, 쉰 다섯의 내가 남은 평생 이제껏 하던 일만 반복하기엔 인생이 너무 길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내 삶의 영역을 넓혀가고 싶습니다. 수모는 있을 지언정, 포기는 없습니다. 공대를 나온 동시통역사, 영업사원 출신 예능 피디, 피디 출신 작가. 영어공부며, 연출이며, 글쓰기며, 처음부터 쉬웠던 일은 단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은퇴 후의 취미 활동도 그렇겠지요. 

저를 안쓰럽게 보던 노인이 그러십니다.

"탁구 초보에게 필요한 3대 자세가 뭔지 알아요?"

"뭔가요?"

"첫째, 모든 이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 여기서는 모두가 나의 선생님이다. 초보의 공을 받아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재미도 없고 초보가 헛친 공을 주우러 다니기도 귀찮거든. 그럼에도 누군가 나와 함께 운동을 한다면 그 분은 내게 코치 선생님보다 더 귀한 스승이야. 코치는 돈 받고 하는 거지. 바쁜 중에 잠깐 짬을 내어 운동을 왔다면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시합을 하고 싶지 초보 연습시켜줄 여유는 없죠. 그러니 누군가 나와 공을 쳐준다면 그분은 선생님이라고 깍듯하게 모셔야 해요."

"여기 계신 분이 다 제게 선생님이군요."

"둘째, 절대 튕기지 않는다. 누가 부르면 바로 "예!"하고 가야해요. 같이 공을 치자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은인이에요. 가야 해요. 그런데 치다보면 민망하지. 실수가 너무 많아서 부끄럽단 말이야. 그래서 치자고 불러도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그냥 기계랑 연습하겠습니다." 하게 되지. 몇번 부르다 자꾸 안 오잖아요? 그럼 다음부터는 안 찾아요. 부를 때는 무조건 가야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저를 보며 말씀을 잇습니다.

"세번째가 가장 중요해요. 초보 시절의 설움을 고수가 되는 밑바탕으로 삼는다. 누가 구박한다면, 그 설움을 잊지 말고 되려 이 악물고 연습해서 고수가 되어야죠. 분노는 힘이 세요. 누군가에게 수모를 겪었다면 그걸 연료로 삼아 더 열심히 연습을 해야지."

"그래서 언젠가 고수가 되면 탁구 시합으로 설욕하는 건가요?"

"엥? 왜 그리 옹졸한 소리를 해? 복수를 탁구로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왜 그렇죠?"

"초보가 고수가 될 때까지, 고수는 그냥 놀겠어요? 그 사이에 더 대단한 고수가 되지. 초보의 설움을 고수가 되어서도 잊지 않는 이유는, 그래야 다른 초보가 왔을 때, 환대해줄 수 있기 때문이야."

"네?"

"초보 시절, 제일 고마운 사람이 누구예요? 나랑 쳐주는 사람이지? 그 고마움을 갚아야지. 고수에게 갚을 순 없으니, 나중에 올 다른 초보에게 갚는 거야. 그렇게 탁구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는 거라오."

김현경 선생님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무척 인상깊게 읽었어요. 사람, 장소, 환대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을 담은 책인데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라는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고요.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나 장소를 갖는다는 뜻이거든요. 피디 김민식이 탁구인 김민식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탁구장이라는 공간에서 환대를 받아야하는데요, 이게 쉽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 설움을 기억해뒀다가, 훗날 새로운 회원이 올 때 반겨주고 서툴러도 함께 운동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은퇴자가 되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야 합니다. 평생 다니던 학교나 회사가 아닌 새로운 공간. 매일 찾아갈 수 있는 곳.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동료를 만날 수 있는 곳.  동네 문화센터든, 바둑을 두는 기원이든, 도서관 독서 토론 모임이든. 처음 가는 이를 환대하는 공간이 늘어나는 것이 세상의 발전이에요.

탁구장을 다녀보니, 저처럼 나이 50 넘어 탁구를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어린 시절 탁구를 쳐 본 분들이 많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탁구장을 다니며 친구들 사이에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자신감이 생겨 꾸준히 계속하다보니 고수가 되는 거죠. 어려서부터 또래 중에서 제일 잘하는 축에 끼었기에, 초보 시절의 설움은 잘 모릅니다. 저처럼 나이 50이 넘어 새로 시작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요. 자존심이 상해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참습니다. 100세 인생, 지금 참아야 훗날 노인이 된 내가 더 즐거워요.

탁구를 시작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초보라는 탁구장의 약자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교훈들... 약자의 설움을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알 수 없거든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 안에서 공감하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앞으로 점점 더 약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회사를 나왔으니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가 되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이 점점 약해지는 노인, 즉 사회적 약자가 되어갈터인데... 약자로 사는 삶에 얼마나 현명하게 적응하느냐가, 제 노후의 삶을 가름하는 잣대가 아닐까요? 

(<짠돌이 노후 수업>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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