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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인생은 복식 경기

by 김민식pd 2022. 3. 7.

(공짜로 즐기는 세상의 새 연재물 <짠돌이 노후 수업>입니다. 픽션 형식의 자기계발 에세이인데요. 새로운 형식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즐겁게 써볼게요~^^)

제 1화 탁구의 신을 찾아서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지하에 문화센터가 있습니다. 어느날 책을 빌리러가는 길에 막 운동을 마친 아저씨 둘이 땀을 닦으며 지하에서 올라오는 걸 봤어요.
"저렇게 탁구 잘 치는 사람 처음 봐. 무슨 노인네가 아주 날아다니네, 그려."
"야, 달리 탁구의 신이겠냐?"


탁구의 신?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지하 강당으로 가봤어요. 경쾌한 탁구공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강당 문을 열고 살짝 들여다보니 탁구대 네 대가 놓여 있고, 몇 팀이 공을 주고받고 있어요. 그래서 누가 탁구의 신이라는 거야?

“보실 거면 들어가서 보시지, 뭘 문가에 서서 그러우?”
돌아보니 허리 구부정한 백발노인이 반바지 운동복 차림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내 얼굴을 보더니 반가운 듯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아이쿠, 오랜만이네! 이게 몇년 만이야?” 
헉! 어떡하죠? 저는 이 할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도서관 저자 강연에서 뵌 분일까요? 그런데 이상해요. 분명 초면인데, 묘하게 낯이 익습니다. 쭈뼛쭈뼛 고개를 숙입니다.

“안녕하세요.”

노인께서는 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뭇한 표정으로 훑어보십니다. 이분은 날 어떻게 아실까요?

"어르신, 죄송합니다. 뵌 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어디서 뵈었는지 제가 기억이 잘……"
"그쪽은 내가 초면일 거요. 나는 옛날에 본 적이 있소만. 탁구 치러 왔어요?"
"아, 탁구 고수님이 오셨다기에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탁구 구력은 얼마나 됩니까?"
"구력이랄 것 까진 없고요. 이제 이 년 좀 넘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젖혀 지긋이 눈을 감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걸까요?

"이 년이라... 아, 그때 참 재밌었지."

"재밌을 때인가요?" 

"그럼, 그때가 제일 재밌지. 하루하루 쑥쑥 느는 게 보이니까." 

친구가 별로 없는 탓인지, 여럿이 하는 운동은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의 즐거움에 눈을 떴죠. 스키, 등산, 서핑 등 나이 들어 다양한 레저 활동을 시도하고 있지만, 다 혼자 하는 운동이에요. 나이가 드니까, 자전거도 스키도 등산도 조금씩 겁이 납니다. 다치면 뼈가 잘 안붙는 나이거든요. 노후에도 즐길 수 있는 안전한 운동이 없을까? 그런 고민 끝에 탁구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어요. 탁구는 상대가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처음 탁구장 등록했을 때는 한 달 동안 공만 줍다가 끝났어요. 아무도 저랑 치려고 하지 않아 멀뚱멀뚱 구경하다 벽 보고 빈 라켓만 휘둘렀습니다. 어떤 분께 공 좀 치자고 했더니, ‘초보 시절엔 자세부터 바로잡아야 하니까 거울 보고 혼자 연습하세요’ 하더군요. 아니, 거울 보고 혼자 빈 라켓 휘두를 거면 집에서 하지, 탁구장에는 왜 갑니까? 혼자 볼 보이 노릇만 하다 서러워서 그만두기도 했어요.

시큰둥한 제 표정을 보더니 노인이 묻습니다. "왜, 탁구가 재미가 없어요?"

"초보 시절에는 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제 평생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했지요."
"어떤?"
"돈을 주고 코치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습니다."

제가 나름 독학은 자신 있거든요. 영어든, 글쓰기든,  운동이든, 다 혼자 책 보고 공부했는데요. 탁구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돈을  내고 코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습니다.

노인이 씩 웃습니다. "레슨비가 꽤 나갈 텐데?"  
"쓸 때는 써야겠더라고요. 20대에는 시간이 많으니까, 돈 대신 시간을 들여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데요.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돈보다 시간이 더 아깝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배워 즐기자는 마음에 큰맘 먹고 돈을 썼지요."
"그렇지. 개인 레슨을 받으면 되지. 코치는 돈을 받고 공도 쳐주고 실수도 바로잡아 주니까."
"탁구 로봇이랑도 많이 쳤습니다."

노인이 문득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 시절에도 로봇이 있었던가?"
"어이구, 나온 지 꽤 된 걸요?"
"아, 탁구 연습 기계 말이지? 자동으로 공을 보내주는. 그래, 로봇 맞구먼."  
"네, 제가 아무리 헛손질해도 기계는 불평하지 않고 계속 공을 주더라고요."

(초보를 위한 최고의 탁구 파트너, 로봇 기계~

착지점, 스핀, 볼 배급 속도 조절이 가능해 치면 칠수록 신통방통한 친구랍니다.)


"그래도 로봇이랑만 치면 재미없을 텐데?"
"복식시합을 했습니다. 둘이서 한 팀을 먹고 시합을 했죠. 저 같은 초보도, 파트너가 잘 치면 나름 게임이 되거든요."

초보 시절에 복식을 할 때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요. '실점을 두려워하지 말자.' 탁구 초보가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낮게 치면 공이 네트에 걸리고, 세게 치면 탁구대를 벗어나니까 공을 살살 높이 띄웁니다. 이런 공은 스매싱 때리기 딱 좋거든요. 상대 팀이 얼씨구나 하고 냅다 강공을 하지요. 제 파트너가 받을 차례지만, 아무리 고수라도 강공을 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 실점하게 되는데요. 공을 못 받은 제 파트너가 실점한 게 아니라, 쉬운 공을 넘긴 제가 잘못한 겁니다.

노인이 묻습니다.

"근데 탁구에서 고수들은 초보랑 한 팀 먹는 거 싫어하는데."
"네, 압니다. 그래서 저는 실점을 해도 제가 한다는 각오로 무조건 세게 칩니다. 네트에 걸리거나 아웃되기도 하지만, 절반 정도의 확률로 들어갑니다. 세게 날아오는 공을 스매싱으로 받기는 어려우니 상대방에서 겨우겨우 공을 넘기고요. 그런 공은, 고수인 제 파트너에게 속공 찬스가 되지요. 점수를 잃어도 초보인 내가 잃는 게 낫습니다. 저야 뭐 원래 초보니까 점수를 잃는다고 자존심 상할 일은 없고요. 그렇게 치니까, 고수들이 저랑 한 팀을 먹고 시합하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일단 저랑 하면, 실점을 해도 제가 하고, 어쩌다 이기면 진짜 고수가 된 것 같으니까요. 우리 탁구장에서 암묵적인 동의가 생겼죠. ‘김민식이랑 한 팀 먹고 이기는 사람이 우리 탁구장 최고수다.’ 나중에는 잘 치는 분들이 서로 저랑 한 팀을 먹으려고 했어요."

노인이 빙긋 웃음을 짓습니다.

"점수를 먹어도 내가 먹는다! 캬아, 멋진 자세네. 내가 말이에요, 이제껏 살아 보니, 인생은 복식시합인 것 같아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함께 하는 시합. 실점이 두려워서 공을 설렁설렁 넘기면, 미래의 내게 속공이 날아들지. 일단 내가 세게 밀어붙여야 미래의 내가 편해요."
"우와! 어르신, 어쩜 그렇게 저랑 생각이 똑같으세요? 비록 나이 오십에 탁구 초보인 나는 매일 굴욕을 겪지만, 꾸준히 연습하면 먼 훗날 나이 팔십의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말거나, 늘 실내 탁구장에서 재미나게 운동을 즐기고 있겠지요. 지금 내가 괴로운 만큼 미래의 나는 즐거워지더라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참 고맙지."
"네? 어르신이 왜요?"
갑자기 노인께서 헛기침을 하십니다. 사래가 걸리셨나? 손을 저으며 하시는 말씀.

"나도 젊었을 적에 그랬단 거죠. 그런데 탁구라는 운동에 그렇게 꽂힌 이유가 뭔가요?"
"제가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라고 늘 말하거든요? 그런데 축구를 두 시간 동안 한다면, 그중 제가 공을 다루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득점은 얼마나 할까요? 수비수라면 득점 기회는 제로에 수렴하고, 공을 다루는 시간도 길지 않지요. 받자마자 재빨리 전방 공격수에게 넘겨야 하니까요. 그런데 탁구는 제가 골키퍼 겸 스트라이커입니다. 매순간이 득점 찬스고요."

  
나이 50이 넘어가자 세상에서 나의 입지가 줄어듭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지는 나이가 50입니다. 탁구는 ‘나의 비중’이 큰 일이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일이에요. 공을 받고 때리며 성취감을 맛봅니다. 나이 50이 넘어 기존에 하던 일에서 과거와 같은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면, 새로 취미를 시작해보세요. 건강한 취미 생활은 만족과 성취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습니다.

 
“탁구는 빈도가 높은 운동이라서 좋아합니다. 동네 탁구장에서 약식으로 하는 시합에서는 한 세트 11점을 먼저 따면 이기잖아요? 진행이 빠를 경우, 십 분이면 3세트 시합이 마무리되고요. 짧은 시간에 많은 점수가 나기에, 탁구만큼 즐거움의 빈도가 높은 운동도 없죠.” 


눈을 반짝이며 탁구의 즐거움을 칭송하는 나를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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