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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80 노인이 된 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by 김민식pd 2022. 3. 28.

('짠돌이 노후 수업'은 매주 월요일에 올리는 소설 형식의 자기계발 에세이입니다. 탁구장에서 만난 노인과의 대화, 4번째 글을 올립니다.)

노인께서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말이죠. 목구멍에 하고 싶은 말이 솟구칠 때 그걸 억누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어째 공부한 효과는 있었습니까?"

"설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셔서 갑자기 제주도를 가자고 하셨어요. 연휴라 남은 방이 없었는데요. 마침 제가 좋아하는 서귀포 바닷가에, 가격도 싸고 괜찮아 보이는 게스트하우스가 있기에 얼른 예약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네."
"아이구, 어르신, 다행은요. 숙소에 가보니 사진이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버지가 버럭 역정을 내셨어요. '왜 이렇게 싸구려 숙소를 잡았냐. 여긴 그냥 여인숙이다, 이 자식아.' 하고."
"어이쿠, 저런! 아버님이 아직 정정하시네."

"방을 둘러보시더니 '5성급 호텔은 방이 없디?'라고 숙소 사장님 면전에서  면박을 주시니 제가 민망해서 얼굴이 벌게 지더라고요."

그때를 떠올리자 그 순간 얼굴 빨개졌던 기억에 선합니다. 노인께서 그러십니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나름 좋은 의도를 갖고 한 일이 나쁜 반응을 불러일으킬 때라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니까."


"연결의 대화 수업 시간에 배웠어요. 상대방의 말에 상처를 입는 순간, 판단, 비난, 자기합리화 등등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일단 억누르고 마음을 들여다보라고요. 지금 나의 감정과 욕구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역정을 내시니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시달린 상처까지 욱신거리더라고요. ‘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며 기껏 고생하고 욕을 먹나.’ 그런 다음 저의 욕구를 살펴 봤지요. 소통, 배려, 존중, 공감, 이런 욕구가 떠오르더라고요."

"원만한 인간관계라면 그렇게 기대하는 게 당연하겠으나, 여전히 부친께 그런 기대를 했다는 게 놀랍구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문득, 나의 욕구가 이렇다면 아버지의 욕구는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아버지도 비슷한 욕구일 것 같더라고요. 배려받고 존중받고 싶은데, 아들이 갑자기 후진 숙소에 끌고 오니까 ‘이놈의 자식이 늙었다고 나를 푸대접하나’ 싶어 화가 나셨겠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아버지, 오늘이 설날이라 5성급 호텔은 예약이 다 찼어요. 남은 숙소 중에서 사진만 보고 골라서 제가 실수를 했네요. 일단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호텔에 방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마침 설 다음날에는 호텔 방이 있더라고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는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남은 2박을 취소 했지요."


"많이 민망했겠네."

"그날 저녁 먹고 들어오는 길에 아버지를 모시고 게스트하우스 베란다로 나갔어요. 바다 건너편에 새연교가 반짝반짝 예쁜 조명 빛을 발하고 있더라고요.

'아버지, 제가요, 지난번 <이별이 떠났다>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 저기서 촬영을 했 어요. 저 야경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려고 욕심을 내다 실수를 했어요. 죄송해요.'"

"그랬더니?"

"‘니가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냐?’ 하고 겸연쩍어 하시더라고요. 다행히 노여움이 풀어져서 남은 여행은 즐겁게 할 수 있었고요."

(아들과 둘이 떠난 여행, 호텔 베란다에서 바다를 보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연결의 대화 수업을 받은 보람이 있구먼요. 퇴근하고 저녁에 세 시간씩 수업을 듣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말이요?"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최고의 노후대비인데 이 정도 노력은 해야지요.  나중에 어르신 연배가 된 제가 지금의 저를 원망하지 않으려면요. 아, 근데 제가 그게 세 시간짜리 수업이라고 말씀드렸던가요?"

갑자기 노인이 헛기침을 하십니다.

"뭐, 그냥 세 시간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지. 아마 고마워할 거요, 아주 많이. 내 나이가 팔십인데 말이요, 만약에 날더러 과거로 돌아가 내 인생의 은인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누굴 찾을까 생각해봤더니 선생 말마따나 그 은인이 바로 나이 오십의 나더란 말이지."


"아, 정말요? 진심 어르신처럼 살고 싶습니다."

"나처럼 사는 비결을 알려드릴까?"

"네, 궁금합니다!"

"50대 시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눈을 감고 팔십 노인이 된 나 자신을 불러내어 물어봤소. '지금 내가 가진 시간을 당신에게 드린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그리고 그가 나에게 부탁한 일을 꾸준히 반복했지요. 때로는 그게 저축이고, 때로는 운동이고, 또 때로는 새로운 취미를 배우는 일이었소. 팔십 노인이 된 나 자신이 가장 고마워할 그 일을 지금 당장 하는 것, 그게 노후를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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