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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고독한 인생 수업

최선의 삶으로 가는 길

by 김민식pd 2022. 6. 20.

제2화 모태 솔로를 만나다 (2번째 이야기)

 

도서관에서 장서 정리 작업을 하며 오래된 잡지를 이용자들에게 나눠주는 행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방위병 시절에 열독했던 잡지도 혹 있는지 찾아 보고 싶었습니다. 옛날 잡지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서가 사이를 누비며 헤매다 구석에서 내가 찾던 잡지를 발견했습니다.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영어 세계』 1990년 5월호. '이야, 이걸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네?' 반갑게 집어 드는 순간, 누가 뒤에서 불렀어요.
“혹시 김민식 작가님이세요?”
살짝 민망해집니다. 돌아보니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20대 초반의 청년이 한 손에 『삼국지』를 들고 서 있었어요.
“아, 예, 안녕하세요. 김민식이라고 합니다.”
먼저 불러놓고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니 청년이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저기요, 제가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 도서관에 왔는데요. 어떤 분이 작가님한테 여쭤보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셔서요.”

"아, 그래요? 누가 그런 말씀을……?"
"어떤 노인분인데요."
유튜브에 올린 진로 특강을 보신 걸까요? 그런데 진로 고민이란 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청년이 머리를 긁습니다. 

"제가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어려서는 늘 아버지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았는데요. 어른이 되고 나니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실은 저도 스무 살 때 똑같았어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헤맸지요. 허구한 날 도서관에 와서 다양한 직업의 저자들이 쓴 책만 읽었거든요."
"책을 읽는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더라고요. 도서관은 어쩌면 죽은 지식의 박물관이 아닐까요? 책은 저자가 찾아낸 답일 뿐이잖아요. 전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나만의 답을 찾고 싶습니다."

슬쩍 청년의 손에 들린 『삼국지』를 봤어요. 그런 사람이 수백 년 된 역사소설은 왜 읽는 거지? 살짝 웃음이 났습니다. 토익, 토플이나 고시 책이 아니라 『삼국지』라니, 이 청년의 방황이 그리 길지 않을 거 같은 느낌이 드네요. 책에서 만난 영웅들이 그에게 훨씬 많은 자극을 줄 테니까요. 이 청년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조언보다 중요한 건 실천입니다. 직접 실천해보기 전에는 그 조언이 맞는지 알 수 없죠. 무엇보다 어떤 일이 내게 맞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것입니다. 적성이 그렇고 진로가 그렇죠. 다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청년에게서 저자 강연을 찾아다니던 내 모습이 보였어요. 작가들의 도서관 강연에 찾아가 손을 들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때마다 저자들은 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었어요. 그들의 강연과 책에서 저는 해답은 아니더라도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죠. 그분들께 받은 걸 돌려줄 타이밍인가 봅니다.

"나만의 진로를 찾고 싶다면, 먼저 ‘삼미’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삼미요?"
"흥미, 재미, 의미요. 내가 평소 흥미를 가진 일이 무엇인가 찾아보고요. 그 다음에 그 일이 재미있는지 직접 해보는 거지요. 재미난 일을 자꾸 하다보면, 잘하게 되고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생기면, 인생의 의미도 찾을 수 있어요."

청년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다 잘 되나요? 아닌 것 같던데? 인생에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그 방향을 알 수 없다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땐, 남이 하라는 일을 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누가 돈을 주지는 않아요. 적어도 남이 시키는 일을 하면 돈은 벌거든요."
"그러니까 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사는 것도, 자기 인생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내 인생에 대한 예의까지 끌어들일 건 아니고요. 지금 당장은 본인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잘하는 일도 없잖아요?"
청년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네요.

"잘하는 일도 없는 건 어떻게 아세요?"
"잘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뭔지 고민 안 해요. 대부분은 그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죠. 그런 삶도 나쁘지 않아요."
"최선은 아니라는 걸로 들리네요."
"최선의 삶은요. 잘하는 게 이미 있어요. 그 일만 해도 주위에서 칭찬받고, 돈도 벌고 그래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거예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까? 잘하는 일이 있는데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새롭게 도전하지요. 계속 그렇게 확장하다보면 잘하는 일이 두 가지, 세 가지로 늘어나고요. 과연 이게 내 삶의 최선일까를 고민하고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은 결국 최선의 삶을 살게 되죠."
"지금 저는 잘하는 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최악인 거네요.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남이 시키는 일을 하라고. 대신, 건성 건성하지 말고 진 짜 열심히 해보세요. 이 악물고."
제 말에 청년은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남이 시킨 일을 억지로 하는 것도 싫은데, 심지어 열심히 해야 해요?"

청년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잠시 기다리며 그가 들고 있는 삼국지를 바라보았어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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