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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by 김민식pd 2022. 4. 25.

살다보면 죽을 뻔하는 고비를 넘길 때가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남훈 씨도 마흔 한 살에 알코올 중독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요. " 술 한 방울만 더 드시면 그땐 진짜 죽는 겁니다." 의사의 엄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든 남훈 씨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 결심하고 문구점에 가서 노트를 한 권 삽니다. '청년일지'라 이름 지은 노트에 써넣은 첫번째 글귀. 

'1995년 12월 14일

어제, 나는 죽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태어났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알코올중독의 삶을 끝내고 건강하게 살 것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태연 / 다산책방)

술을 끊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남훈 씨,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됩니다. 은퇴를 결심하고 20년 전에 쓴 청년일지를 보며 삶의 버킷리스트를 하나 둘 찾아 나섭니다. 마흔 살,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찾아봐요. 그 중에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있고, 플라멩코를 배워 스페인 여행을 하는 것도 있죠. 나이 60에 스페인어를 배우겠노라 결심하고 학원을 찾아갑니다.

'일주일 뒤. 설레고 또 두려운 마음으로 차를 몰아, 남훈 씨는 스페인어 학원에 갔다. 그리고 교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가 났다. 왜냐하면 거기에 자기 연배는커녕, 3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혹스럽게도 많은 학생이 남훈 씨를 스페인어 강사로 오인했다. 고개를 숙이고, 남훈 씨는 교실 끄트머리로 가 수줍게 자리 잡았다. 잠시 후 들어온 스페인어 강사 역시 3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강사가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어는 그 사용자 수가 2위에 달해요. 3위인 영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언어죠.”

 ‘뭐라고?’

 남훈 씨는 책상 앞에 얼어붙었다. 흔한 영어를 피해 고심 끝에 택한 스페인어가 더 흔한 언어라니 기가 막혔다. 강사는 계속 말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많은 국가가 현재 화려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언어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지요. 이 언어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멋진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관계?’ 그 말이 남훈 씨의 불만을 슬그머니 가라앉혔다.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남훈 씨는 스페인어 강사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렇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스페인식 문법에 따라 말하는 법도 배워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어 - 목적어 - 동사 순이 아니라,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으로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대신 I love you. 나는 사랑한다, 너를.

오래 전 헤어진 딸을 만나 사과할 때도, "나는, 너가 어렸을 때,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하고 말이 웅얼웅얼 길어집니다. 이럴 때, 스페인어 문법으로 말을 하니 수월하네요. "내가 미안하다. 오늘에야 너를 찾아서." 라고.

남훈씨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섯 번째 과제를 자서전 쓰기로 정한 것은, 딸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살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 그 애가 아비를 찾았는데 내가 이 세상에 없으면 어쩐담?’

 남훈 씨는 그런 때 자식이 읽을 수 있는 뭔가를 남기고 싶었다. 실제로 남훈 씨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 그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터놓고 대화할 날이 오겠거니 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모든 걸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별안간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서 말하는 걸 꺼렸다. 식구 중 누군가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왈칵 성질을 부려대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줄줄이 어린 동생들에게 아버지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고 말았다.'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같아요. 내가 평생을 살면서 배운 것을 어린 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읽는 1호 독자는 딸들입니다. 민서가 제 책을 읽으며 책 속에 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찾거든요. ^^ 모든 엄마와 아빠들이 노후에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우리 세대가 평생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아이들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자서전을 쓰는 거죠. 출판의 용도가 아니어도 좋아요. 언젠가는 딸들이 제 객쩍은 수다가 그리울 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이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소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열여섯이고, 당신이 마흔둘이던 겨울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창조하며 살아왔습니다.

‘1997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분이 살아계시길 바라며 아버지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주었어요.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깨닫게 된 건 이 아버지가 꼭 내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 나만의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동안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의지한 모든 분께 노년의 삶을 상상할 여유를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모든 분께 아버지를 상상할 기회를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플라멩코를 추는 멋진 노인의 삶을 꿈꿔볼 수 있었어요.

소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남훈씨의 대사로 오늘의 책 소개를 마칩니다.

“한번 상상들 해봐요. 스페인 거리에서, 그 사람들은 나를 볼 겁니다. 동양 어딘가에서 온 영감이 제법이라고 생각할 테죠. 기분이 내키면 리듬에 맞춰 손뼉을 쳐줄 거요. 운이 좋다면 스페인 무희가 장단을 맞추어줄 수도 있지.”

두 팔을 들고 남훈 씨는 우아하게 스텝을 내디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날 겁니다. 그게 완벽한 플라멩코는 아닐지라도, 예! 나는 행복할 거요. 사실 난 완벽한 플라멩코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냥 플라멩코를 추고 흥분된 감정을 나누고 싶을 뿐. 그때 광장서 본 사람들은 돌아서면 그만일 테지만, 이따금 가족에게 말할 겁니다. ‘아, 그 동양 노인네 플라멩코를 추데. 진짜 신기한 광경이었어.’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나는 좋아요. 근데 진짜 끝내주는 게 뭔지 압니까, 선생? 그게 상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거라는 거요. 예, 나는 갈 겁니다, 스페인으로. 그게 바로 스페인어 문법이오.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로 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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