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나를 존중하는 삶

by 김민식pd 2022. 4. 6.

저는 강의를 듣는 걸 좋아합니다. 도서관에서 열리는 저자 특강을 쫓아다녔어요. 책벌레인 제가, 작가님의 말씀을 직접 눈 앞에서 보고 듣는다는 건, 케이팝 팬이 아이돌의 무대를 직관하는 것 같은 희열을 안겨줍니다. 심지어 공짜로! ^^ 그렇게 강의를 듣는 걸 좋아하니,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아하죠.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만 가끔 강의하러 갔다가 상처받고 올 때도 있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요. 정신분석가인 이승욱 선생님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어요.
<마음의 문법> (이승욱 / 돌베게)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3분의 1은 한 팔을 깔고 엎드렸다. 3분의 1 정도는 스마트폰을, 또는 옆에 앉은 남자/여자 친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강단 쪽을 바라보는 나머지 학생들도 강의에 크게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 말들은 자음과 모음이 파쇄되어 허공으로 산개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강의실 빈 공간에 의미 없이 수북이 쌓여갔다. 야심 차게 준비한 하이데거와 실존, 정신분석 강의는 청중의 무기력에 의해 무기력해졌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의 강의 경험이다. 나름 강의 좀 한다고 자부했던 나는 무기력해진 채로 돌아왔다. 상처라면 상처였다.
저 200명 넘는 젊은이들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은, 달리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는 무기력의 함성이었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전달하는 메시지는 나를 당황스럽고 불안하게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수동적인 자세로 이다지도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무기력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증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18쪽)
저도 작년에 어느 중학교 강의를 갔다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수업중인데도 등돌리고 앉아 뒤에 앉은 아이와 낄낄거리고 웃기에 주의를 줬더니 금세 조용해지더군요. 네, 아예 엎드려 자더라고요. 멘붕이 와서 다음부터 중학교 강의는 고사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어요. 연락을 주신 선생님은 간곡하게 부탁하셨거든요. '서울에서 차타고 5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시골 학교라 저자분을 모시기에 쉽지는 않은데요. 꼭 피디님을 모시고 진로 특강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열의와 학생들의 무관심 사이에서 고민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승욱 선생님은 같은 학교에서 2년 후 다시 강의 요청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심지어 축제 기간 중에 무료 강연을 해달래요. 강의 주제를 '무기력'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요.
'부모는 자녀를 착취한다. 아이는 생명을 걸고 공부하지만 부모는 조금도 만족하지 않는다. 더!더!더!를 외치며 아이의 노력을 착취해서 자신의 행복을 채우려 한다. 기업은 실적과 성과라는 이름으로 직원의 피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제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편 갈라 서로를 착취하게 하면서 또 싸움을 부추긴다. 남녀는 외모와 능력의 유무로 서로를 착취하면서도 혐오한다. 국가는 이 모든 것을 방조하고 조장하며 나아가 국민의 양심을, 정의를, 미래를, 심지어 생명까지 착취한다.
학생들에게 말했다. 지난 12년간 여러분은 부모의 욕망을 위해, 학교의 실적을 위해, 교육제도의 실험 대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써왔다. 많은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사용했을뿐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울하고 까닭 모를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기력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 본능의 발로다. 그러니 여러분의 무기력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이승욱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기계발서를 읽고 힘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명사의 강연을 듣고 심기일전하려 하지도 말고, 여행을 해서 충전하려 하지도 말고 자신의 무기력을 수용하라'고 말하십니다. 무기력이라는 증상도 그저 살고 싶다는, 착취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자기 보전의 행위라고요.
책을 읽고 부끄러웠어요. '아, 그렇구나!' 저는 진로 특강을 가서 공대를 다니던 내가 어떻게 책을 읽고 피디가 되었는지, 어떻게 영어책 한 권 외워서 동시통역사가 되었는지, 신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말들이 지금의 중학생들에게는 또하나의 고문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저 아저씨도, 책 읽고 영어 공부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구나... 하고요. 아이들이 제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걸 저는 무력 시위로 느꼈는데요. 책을 읽고 나니 그 또한 아이들의 살려는 몸짓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인간의 모든 증상은 하나의 메시지다. 우울은 내가 나 자신의 분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절규이며, 강박은 소외된 나 자신의 실재를 확인하려는 의례이며, 무기력은 착취당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대한의 몸짓이다. 공황은 욕망에 휩쓸려 자기를 상실해가는 자들이 두려움을 느껴 무서워하는 얼굴로 자기를 다시 찾아달라고 주체에게 애걸하는 모습이다.
자기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 때까지 삶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이며, 작은 예시들이다.'
책에는 정신분석가로 다양한 사례를 접하고 공부하며 느낀 점들이 나오는데요. 우리에게 가장 힘든 관계 중 하나는 부모 자식 관계지요. 마르크스와 함께 책을 쓴 엥겔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고향에 지나다가 그의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드리고 당신의 아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써서 크게 유명해졌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어머니는 "제 자본이나 잘 돌보지"라고 비아냥댔다고 한다.'
(86쪽)
저는 이 대목을 읽고 큰 위안을 얻었어요. 아,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구나...
오늘의 질문 : 훌륭한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요?
'신경질(짜증, 화) 내지 않는 부모다. 자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여기고 온갖 악감정을 쏟아내는 어머니, 자녀를 폭행함으로써 자신의 좌절과 열등감을 푸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인류의 고전이다.'
(87쪽)
작은 선한 결정과 행위의 결과물들이 쌓여 선한 사람을 만들고, 계속된 악한 결정과 행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악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지요. 부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이를 위해 하는 말이 어쩌면 아이를 착취하는 말이 아닐까 돌아보며 살고 싶습니다. 우선 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를 어떻게 존중하며 살 것인가, 를 고민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존중하고 내가 존중받아야 내 주위 사람들도 존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요?
오늘도 삶에 대해 깨우쳐주시는 스승님을 책으로 만나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