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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도시 여행자의 시선

by 김민식pd 2022. 4. 18.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똑같은 사물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거든요. 한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책이 그래서 재밌어요. 박노자의 책도 그렇고 로버트 파우저의 글도 그래요.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하고 한국에서 사는 파우저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에요. 심지어 이 분은 한글로 책을 써요. 읽는 내내 감탄했어요.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로버트 파우저 / 혜화 1117)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도심 산책을 즐기는 분인데요. 강남의 아파트는 걷는 이들에게 불친절합니다. 아파트마다 높은 담장을 쌓고 정문은 차량 출입로와 차단기가 지키고 있어요. 미국에선 아파트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거든요. 부자들은 교외에 저택을 짓고 살죠. 파우저는 질문을 던져요.

오늘의 질문 : 한국에서는 왜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 된 걸까요?


'한국은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업화 정책이 국가 전체적으로 확산, 정착되면서 경제적인 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경제적으로 일정한 성취를 거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상징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아파트는 1970년대 중반 일종의 붐처럼 본격적으로 건설되면서 문화 시민의 생활 방식에 어울리는 주거지로 각광 받기 시작했고, 나아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가난을 벗어났다는 의미 외에 화이트 칼라 계층으로의 진입을 상징했다. 여기에 더해 1980년대에는 자가용의 소유가 화이트 칼라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 이 무렵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이러한 상징의 기호와 맞물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깨끗하고 좋은 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그러니 아파트의 출입구가 자동차 중심인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물론 서울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이미 1920년대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은 단독주택과 자동차였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교외에 잔디가 깔리고 정원이 딸린 아름다운 단독주택을 소유하고, 번잡한 도시에서 단독주택으로 오갈 때 자가용을 이용하는 모습이야말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화이트 칼라의 전형이 되었다.'  

미국의 주요 도시 외곽에 펼쳐진 넓디 넓은 단독주택 단지와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따라서 다르면서도 흡사합니다. 사회적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 그 선망의 대상을 이루는 풍경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도시를 걷는 산책자들을 마을 안까지 환영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 설계를 소망합니다. 지금의 아파트는 너무 배타적이에요.

로버트 파우저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냥 서울 사람입니다. 태어나서 고향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산 도시가 바로 서울이니까요. 북촌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만 보아도,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책에는 제가 좋아하는 여행지, 런던도 나오는데요. 

'2017년, 런던을 찾은 나는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유명해진 스피탈필즈Spitalfields를 찾았다. 이번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현황을 살피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파가 대단했는데, 유명한 관광지답게 대부분 사진을 찍는 데 열심인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눈에 띄는 초콜릿 가게에 들어갔는데 점원은 매우 피곤해 보였고,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혹시 미국식 영어를 쓰는 내 말투 때문에 반감을 가진 걸까 잠깐 생각했지만 다른 손님들에게도 별 차이가 없었다. 영어가 서툰 아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불친절했다.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근처의 책방을 찾았는데 이곳 역시 친절하지 않았고, 내가 뭘 물어봐도 시큰둥했다. 책을 더 볼 기분이 내키지 않아 곧 나왔다.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거리의 분위기는 ‘런던’다웠다. 거리는 화려하고 건물은 예뻤다. 실제의 런던과는 동떨어진, 이미지로 만들어진 ‘런던’과 매우 비슷한 런던의 거리를 걷고 있자니 기분이 매우 묘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내 기분이 묘해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여전히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거리의 풍경보다 자신의 모습을 찍느라 바빴고, 그러면서 즐거워했다. 이 지역은 바로 이런 ‘셀카 촬영’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오래된 거리, 신기한 간판, 활기찬 인파 등으로 ‘런던다운’ 배경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 스스로를 등장시켜 완성한 한 장의 사진은 완벽한 여행의 ‘인증샷’이 되어준다. 이 지역만의 문화나 멋, 맛을 즐기기보다 셀카 촬영에 몰두하는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춰 가게들은 안팎을 꾸며 손님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가게 입장에서 보면 이런 손님들은 모두 한 번만 오고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이들이다. 이들이 단골 손님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니 손님들에게 특별히 친절할 이유도 없다. 식당들 역시 맛과 서비스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셀카용 배경으로서의 이미지만 잘 만들어놓으면 장사가 된다.'

작년에 제주 여행을 하며 이 대목을 읽고 무릎을 쳤어요. '앞으론 관광지에 있는 식당보다는 시장통 맛집을 찾아가야겠구나!'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식당이 음식이 맛있고 친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군요.

로버트 파우저, 참 많은 걸 경험하고 많은 생각을 글로 나누는 분입니다. 이분이 쓴 <외국어 학습담>과 <외국어 전파담>도 재미있으니 한번 찾아보시길~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블로그 업로드 횟수를 줄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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