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1살 난 큰 딸 민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민지에게

민지야, 아빠는 오늘 큰 결심을 했단다. 아빠가 지금 쓰고 있는 맥 프로 노트북을 네게 주기로. 물론 너 주려고 산 것이긴 하지만 아빠가 몇 달간이나마 갖고 놀고 싶었거든. 그러나 마음을 바꿨어. 아빠보다 네가 몇 달 더 빨리 맥 북을 갖게 된다면, 그게 더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네가 맥북을 가지고 뭔가 만든다거나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기를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야. 난 네가 맥북을 그냥 가지고 재미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보기에 맥북은 최고의 장난감이거든.


민지야. 요즘 학원 여러개 다니느라 힘들지? 네가 엄마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고 한참 웃었단다. 30년전에 아빠가 했던 불평이랑 똑 같더구나. 아빠도 민지가 학원 많이 다니는거 반대야. 수영이든 중국어든 그림이든 네가 재밌는 것만 해도 바쁜데 말이야. (물론 이 말 했다고 아빠가 엄마한테 혼이 나긴 할거야. "민지한테 인기 끌려고 그런 얄팍한 소리 하지마!" ㅋㅋ 혼나도 할 수 없지, 머. 이게 아빠의 진심이니까.)


아빠도 어렸을 때 학원을 몇 개 다녔어. 아빠가 민지 나이 때 무슨 학원 다녔는지 알아? 글씨 학원이랑 주산 학원 다녔어. 아빤 글씨를 정말 못 쓴단다. 민지도 알지? 친구들은 아빠 글씨를 보고 지렁이가 꿈틀꿈틀 기어가는 것 같다고 '토룡체의 창시자, 김민식 선생'이라고 놀렸어. 할아버지는 아빠가 글씨를 못 쓰니까 절대로 문과에 가면 안된다고 하셨어. 아빠는 글을 쓰는 직업을 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억지로 이과로 보내셨지. 그때 이유 중 하나가 아빠의 글씨였어.


책읽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할아버지는 억지로 의대에 보내려고 하셨단다. 이유가 뭔지 아니? "글씨를 못 써도 괜찮은 직업이 의사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아빠는 알지. 그냥 아들을 의사로 키우는게 당신의 꿈이었으니까 그랬던 거야. 정작 아빠는 의사가 될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도, 성격이 꼼꼼하지도 않은데 말이야. '의대를 못가면 너는 불효자식이다.' 할아버지가 아빠를 얼마나 혼내셨던지... 아빠는 지금도 그때의 할아버지는 잘 이해가 안가. 자신의 꿈과 자식의 꿈을 왜 구분하지 못하셨을까?


그런데 아빤 왜 그렇게 글씨를 못 썼냐구? 아빠는 어릴 때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을 좋아했어. 절대 아빠가 천재라는 뜻은 아니야. 그냥 왜 천재들이 악필이 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어. 생각의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지. 머리 속에 솟아나는 생각을 막 적어가다보면 글씨는 꼬불꼬불 엉망이 되기 일수였어. 아빠를 살려준 건 컴퓨터의 등장이야.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나오면서 비로소 아빠는 글씨체 걱정하지 않고 내 생각을 자유자재로 글로 옮길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30년전에는 컴퓨터가 없었거든? 그래서 아빠도 그때는 글씨를 못 쓰면 취직을 못할거라 생각했었어. 열심히 서예학원에 다녔지만 너무 괴로웠어. 아무리 노력해도 글씨를 얌전히 또박 또박 쓸 수 없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일이지? 글씨를 못 쓰면 취직이 안될거라 생각했다니? 주산 학원도 마찬가지야. 그때 그렇게 열심히 주산을 연습했는데, 이제는 평생 살면서 주산을 구경도 못하고 있으니...


아빠는 민지 친구들이 학원을 10개씩 다니는 걸 보고도 비슷한 생각을 한단다. 저 중에 30년 후에 아무 쓸모 없는 공부도 많을텐데... 지금 엄마들이 불안한 이유는? 대학을 졸업한 언니 오빠들이 취업하기 힘들어서야. 그런데 그건 언니 오빠들 탓이 아니란다. 우리 사회의 인구 구조상 그럴수 밖에 없단다. 베이비붐이라고 1960년대 앞뒤로 비슷한 시기에 정말 많은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경제 활동 인구인 4~50대를 차지하고 있어 취업의 기회가 적은 것이란다. 하지만 민지가 사회에 진출하는 20년 후에는 반대가 될 거란다. 퇴직인구가 취업인구를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 그래서 취업하기가 훨씬 쉬울거야. 그런데도 엄마들은 현재의 상황만 보고 겁을 먹고 5살짜리 아이들을 월 100만원짜리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거란다.


아빠가 점쟁이처럼 예언 하나 할까? 지금 5살난 아이가 일하는 30년 뒤에는 영어 공부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몰라. 아마 자동 통역기나 자동 번역기가 나올걸? 생각해봐, 아빠가 30년전에 그렇게 열심히 서예를 배우고, 주산과 암산을 공부했는데, 그게 쓸모없는 세상이 올 줄 알았겠니?


분명한건 지난 30년간 일어난 변화보다 앞으로 30년간 더 큰 변화가 온다는 것이지. 세상은 더 살기 편리하게 바뀔 거야. 지난 30년간 세상은 더 좋아졌는데 왜 아이들의 삶은 더 불행해지는걸까? 이건 무조건 부모들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음을 살짝만 고쳐먹어도 모두가 행복해질텐데...



그럼 왜 엄마는 민지에게 영어공부하라고 그러냐고? 아무도 손글씨를 쓰지 않는 요즘, 오히려 손으로 글씨를 예쁘게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능력이 될 수 있단다. 예술가로 대접받을 수 있지. 모두가 컴퓨터 통역기에 의존하는 시대에는, 머리로 직접 통역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될 거야. 예술가가 되는 조건이 뭔지 아니? 남이 시켜서 일하는 사람은 월급쟁이고, 스스로 원해서 일하는 사람은 예술가야.


아빠가 민지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야. 무엇을 공부해도 불안해서 억지로 하지는 마. '이걸 못하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성공할 수 없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래.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하지마. 영어든, 수학이든, 미술이든, 그 자체로 재밌어서 했으면 좋겠다. 아빠는 영어가 재밌었어. 해리 포터를 영어로 읽는 것도 재밌고, 영화 라이온 킹을 영어로 보는것도 재밌었거든.


아빠가 민지에게 맥 북을 주는 이유... 다가올 세상에 대비해 민지가 포토샵, 프리미어, 드림위버를 배우라고 주는게 아니란다. 그냥 민지에게 좋은 장난감 하나 추천하는 마음으로 주는거야.


스티브 잡스란 사람이 있지? 민지가 좋아하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든 사람이야. 이 사람이 맥 북 프로도 만들었는데, 노트북에 프로란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뭘까? 그냥 취미로 하는 사람 말고, 디자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구라는 뜻이야. 프로를 위한 노트북이지.


근데 아빠는 맥 북 프로야 말로, 아마추어를 위한 최고의 창작 도구라고 생각해. 아이무비를 가지고 민지가 비디오를 찍고, 편집해서, 직접 유튜브에 올려봐. 정말 쉽단다. 맥을 한번도 써보지 않은 아빠도 하루만에 해냈단다. 아이포토를 가지고 민지가 찍은 사진을 예쁘게 꾸며서 페이스북에 올려봐. 친구들이 서로 자기 사진도 편집해 달라고 부탁할 걸? 개러지밴드로 민지가 음악도 연주하고 새로운 노래를 직접 만들어봐. 아빠는 민지가 언젠가 개러지밴드로 직접 팟캐스트 방송을 만들 날이 올거라 본다.



민지야, 8살때 아빠가 일하는 촬영장에 와 본 적 있지? 아빠가 큐를 주면 거리에 서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네가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몰라. 민지야, 아빠는 PD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단다. 재밌는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거든.


민지도 아빠가 하는 일을 맥 북 프로를 가지고 할 수 있어. 재미난 동영상이나 사진,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거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될 걸? 아니, 보는 사람이 적어도 절대 실망하지는 마. 중요한건 민지가 만들면서 재밌어야 한다는 거니까.


민지야, 아빠는 민지의 넘버 원 팬이야. 민지가 무엇을 만들던 가장 열심히 즐기고 댓글달고 응원할 준비가 되어있어. 왜? 민지가 아빠의 넘버원 팬이니까. 아빠가 만든 드라마를 제일 재밌게 봐주는건 바로 민지니까.


민지야, 네가 무엇을 하든, 딱 하나만 기억해.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
민지는 민지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야.

(이 사진 찍었을 때, 기억나지? 민지는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제일 이~뻐!)

민지가 행복하게 사는게 아빠를 위한 최고의 효도야.
아빠를 위해 공부를 잘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마.
아빠를 위해 민지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아빠가 바라는 일이 아니야.
아빠는 오로지 민지의 행복을 응원할 뿐이란다.
드라마 촬영하느라 아빠가 집에 못 갈 때, 민지 속상하지?
이해해줘, 아빠는 일할 때, 가장 행복하니까.
아빠의 행복을 위해 아빠가 집에 못오는 것도 민지가 이해해주는데,
민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걸 아빠도 이해해야지.


아빠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민지야.

민지에게 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게.
사랑한다, 민지야.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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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채집자 2012.01.17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물 찔끔!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빠의 진심이 담긴 편지였어요! 민지가 많이 행복하겠네요!!!

  2. 이미현 2012.01.17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지한테 인기 끌려고 그런 얄팍한 소리 하지마!' 귀에서 사모님의 목소리가 쨍~ 하고 울리는 듯...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아빠마음 너무 이쁘게 와 닿네요. ^^ 민지아빠 화이팅!!!

    • 김민식pd 2012.01.18 0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당~ 민지가 너무 이쁜 아이라 그래요. 민지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아이의 아빠라는게 얼마나 큰 복인가~ 이렇게 이쁜 민지를 위해 더 좋은 아빠가 되어야지! 그래요. 절대 민지에게 인기 끌려고 하는 소리 아니랍니다. ^^

  3.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1.17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정 듬뿍 담긴 편지네요:-) 아침부터 마음이 뜨듯해요^.^ 설에 내려가서 드릴 편지를 써봐야겠어요!!

  4. 살찐 백조 2012.01.25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아빠의 러브레터..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제 딸에게 왜 그리 바라는 것이 많은 엄마였을까? 하는 조금의 반성도 하였답니다.

    돌아서면 또 다시 딸에게 바랄거면서...... ㅋㅋ

  5. 슐안 2012.05.30 0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감동적이네요.
    제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저도 나중에 피디님과 같은 멋진 철학을 갖고 자식 키우고 싶어요^^

  6. 김윤혜 2013.01.22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정말 너무나 좋은아빠이세요~^^제가 받은 편지인양 너무 감동 받았어요~정말 멋진아빠이십니다

    • 김민식pd 2013.01.23 0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우!
      오래전에 쓴 글인데, 윤혜님 댓글 덕에 오늘 한번 더 읽어보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좋은 아빠가 아니구요, 민지란 아이가 너무 이뻐서 늘 고민하고 삽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멋진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언젠가 이 댓글이 민지의 눈에 띄기를 바랍니다. ㅋㅋㅋ)

  7. 천체사진 2017.03.08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피디님
    책 인터뷰한 글 읽다 블로그 소개보고 피디님 첫 글을 읽게 됩니다
    따님께 쓰신 편지인데 왜 제가 찡할까요
    정말 진심이 담긴 글이라 그렇지 않을까요?
    따님께선 지금 어떤 대한민국 중3의 삶을 살고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부디 골아픈 자사고 입시가 아닌 정말 좋아하는 공부를 재밌게 하고있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