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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눈 내리는 인왕산 여행

by 김민식pd 2022. 2. 3.

2021년 1월 28일의 여행기입니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보니 낮에 눈이 온다는군요. 서울 시내, 설경이 좋은 곳을 검색하다 인왕산을 소개한 블로그를 봤는데요. 보는 순간, 마음이 움직였어요. 이젠 다리를 움직여야 할 시간~


3호선 전철을 타고 경복궁 역에 내리면, 오전 9시 30분 사직단에서 시작하는 걷기 여행이 시작됩니다.


단군성전을 지나 인왕산길로 접어듭니다. 선바위와 국사당을 지나 3호선 독립문역까지 가려고 했는데요. 

9시 50분에 수성동 계곡에 도착했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와, 눈 내리는 인왕산 수성 계곡. 30분전까지 나는 서울의 번잡한 도심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는 조선 시대 산수화 속 풍경을 걷고 있습니다. 이거 혹시 타임 슬립인가요?

겸재 정선이 이곳 수성동 계곡을 그림으로 남겼대요. 갑자기 신선이 된 기분입니다.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럽네요. 인왕산을 오르는 건 포기했어요. 쌓이는 눈을 조심조심 밟아 다시 내려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초등학생 시절, 수업하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리면, "선생님! 눈와요! 나가서 자율학습 해요!"라고 애타게 외쳤지만, 먹힌 적은 없죠. 은퇴하니까 이게 좋네요. '오늘 눈 오네? 그럼 어딜 갈까?'

아, 진짜 좋네요. 속세를 떠난 선비처럼 정자에서 눈을 피하고 세파를 피합니다. 인왕산을 오르지 못해 속상하진 않아요. 나이 쉰 다섯이에요. 이제는 이루지 못한 꿈을 한탄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게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돌아보고, 내게 주어진 소소한 일상을 즐깁니다.

제 고향은 남쪽 바닷가 울산입니다. 울산에선 겨울에 눈이 쌓이는 게 1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에요. 서울에 올라온 후, 쌓인 눈을 보는 게 그렇게 신기하고 좋았어요. 스키에 빠진 것도 푹신푹신한 눈 위에서 마음껏 놀 수 있기 때문이죠. 회사를 다니다 눈이 내리면 점심 시간에 회사 근처 상암공원으로 달려갔어요.  

2020년 12월 14일, 눈 내린 상암공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런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게 직장 생활의 행복이었습니다. 90년대에는 여의도 공원, 2000년대에는 일산 호수 공원, 2010년대에는 상암공원을 즐겨찾았어요. MBC 사옥 이주에 따라 점심 소풍 장소가 바뀐 거지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회사를 다닐 때나, 회사를 떠난 후나, 삶의 자세는 변화가 없어요.

1020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걷습니다.

눈이 오니 늘 보던 풍경도 색다른걸요? 이국적 풍경에 여행 온 맛이 납니다.

오늘의 질문 : 은퇴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은퇴자의 삶은 말년 병장을 닮았습니다. 군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은 몸을 악착같이 사립니다. 부대 대항 축구 시합을 나가도 살살 뜁니다. 괜히 공을 몰고 상대팀 골대를 향해 달리다 태클에 걸려 다리를 다치면 제대를 해도 놀러다니지 못해요. 몇달만 참으면 자유의 몸이 되는데, 함부로 몸을 굴리지는 않습니다. 은퇴자도 마찬가지예요. 몸을 사립니다. 저는 30년 동안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었어요. 드디어 쉰 다섯의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얻었는데, 괜히 눈오는 날 산에서 굴렀다가 다치면 나만 손해예요.

눈 온다고 산행을 포기하다니, 나는 쫄보인가?

아닙니다. 나는 말년 병장입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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