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쉬는 동안, 책을 읽고 짤막한 리뷰를 휴대폰 메모장에 남겼어요. <믿습니까? 믿습니다!>란 책을 읽고 남긴 메모가 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뿌리부터 흔드는 책. 농사가 미신이라니, 엉뚱한 주장 같은데 묘하게 빨려든다. 앞부분은 문명사를 미신의 역사로 풀어가는데, 뒤로 갈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과학이 발달한다고 미신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보다. 짧은 저자소개만 읽고도 웃음이 난다. 이야기꾼의 재능이란 이런 것.'
그 책을 낸 오후 저자가 새 책을 냈어요.
<가장 공적인 연애사> (오후 / 날)
이번 책의 저자 소개입니다.
'지난 30년간 응원하는 야구 팀이
이기기보다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그루밍된 덕분인지
승리보다 패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이기는 선수보다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더 좋아한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면 불타올라 글을 쓰고,
헤어지면 잊기 위해 글을 쓰고,
평소에는 무료해서 글을 쓴다.
세상사 중요한 것에 관심이 없으며
덜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건다.
쓸데없이 고퀄리티를 추구하며
하루하루 낭비하며 산다.'
소개글만 봐도 '이 저자 재밌네?' 싶은데요. 뒤이어 나오는 목차...
'프롤로그 : 연애는 원래 어렵다
1장. 원시 사회 : 막 했겠지 하는 오해
2장. 고대 사회 : 오늘은 스리섬이 좋겠어
3장. 중세 사회 : 주님은 CCTV
4장. 근대 사회 : 거시기에 자물쇠를 채워라!'
차례까지 읽었더니, 본문을 읽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어요.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인용문으로 시작해요.
"사랑은 늘 자신을 속이면서 시작하고,
남을 속이면서 끝난다.
세상은 그걸 연애라 부른다."
어려서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연애 이야기를 조르고요. 자라서는 남들의 연애사가 궁금해요. 그 재미난 연애 이야기를 아예 한 권의 책으로 다뤘으니 오죽 재밌겠어요. 연애의 시작은 무성 생식을 하던 생명체가 양성 생식을 시도한 거죠. 초기 생물은 세균처럼 자기 복제를 하고요. 그럴 때, 생명체가 너무 빨리 늘어나 환경 파괴로 이어질 수 있어요. 과한 번식이 오히려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죠.
'무성생식을 하는 생명체는 보통 번식이 빠르다. 당신이 성욕을 느껴 스스로 위로할 때마다 아이가 생긴다고 상상해 보라.
그래서 생명체는 이 무분별한 증식을 막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해답이 바로 유성생식이다. 짝을 찾는 동안은 번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례로 소형 갑각류나 단세포 생물은 살기 좋은 환경에서는 종자를 많이 퍼뜨릴 수 있는 무성생식을 하지만, 개체 수가 늘어나 환경이 척박해지면 갑자기 유성생식으로 바꿔 번식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사례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성이 번식을 촉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한하려고 탄생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짝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아무튼 연애란 '번식 좀 그만하라'는 자연의 준엄한 명령을 어기고 서로를 유혹해 파트너를 만들어 내는 행위다. 그러니 그 과정이 쉬울 리 있겠나.'
(프롤로그 중에서)
제가 책을 고르는 요령. 저자 소개와 목차와 서문을 읽고, 구미가 당기면 옷깃을 여미고 책을 마주합니다. 서문까지 읽으니 흥미가 생겨요. 아, 저자의 관점이 독특하구나! 연애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책을 읽으며 내내 킥킥 거리며 웃었어요. 감히 '인간 번식의 흑역사'라 불러봅니다.
제게도 연애의 흑역사 시절이 있었어요. 대학 입학하고 2년 동안 소개팅, 미팅, 과팅에서 스무 번 연속으로 차이던 시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에요. 이 책을 그 시절에 읽었다면 위로가 되었을까요?
<가장 공적인 연애사>, 연애 이야기 듣듯 흥미롭게 읽어가다보면, 문득 생물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더 유식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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