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다보면 문득 저자가 살아온 삶이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전범선 저자의 한겨레 칼럼을 읽다가 밴드 '양반들'의 보컬이라는데 '가수가 글을 참 잘 쓰네?'했어요. 나중에 그 분이 자신의 모교인 민족사관고에 대해 글을 쓴 걸 보고, '응? 공부도 잘했나 보네?' 싶어 문득 궁금했어요. 민사고를 나온 딴따라라니, 이 분은 어떤 삶을 산 걸까? 이제 그분의 책을 찾아볼 시간입니다.
<해방촌의 채식주의자> (전범선 / 한겨레출판)
이 분 한 때 별명이 '강원중의 전설'이었어요. 입학 후, 졸업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문득 비결이 궁금해집니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 중 하나는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에요. 승부욕이 강한 저자는, 춘천 호반초등학교를 다닐 때 축구부였는데요. 초등학교 1학년에서 4학년까지는 수업도 땡까고 공만 찼다고요. 어느 날 길 건너 부안초등학교와 시합을 합니다. 공격수로 나섰으나, 득점은 없고, 상대편 공격수는 탁월했대요. 결과는 5대 0. 나중에 알고 보니 손웅정 감독이 부안초등학교 축구부를 지도했고, 그의 아들 손흥민이 공격수였다고요. 축구를 접고 공부에 전념하기로 합니다. (손흥민이 진로 지도 해준 건가요? ^^)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경쟁이다. 하지만 축구나 농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는 이기는 게 내 마음처럼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팀원들이 못하면 졌다.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이겼을 때 돌아오는 사회적 보상도 크지 않았고, 그것마저 팀원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
공부는 그렇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됐다. 육체적으로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1등 했을 때 돌아오는 영광은 나의 독차지였다. 나는 운동에서 채우지 못했던 승부욕을 공부에서 채우기 시작했다. 그게 훨씬 재밌었다.'
(28쪽)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 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적어요. 그럼에도 저는 드라마 피디에서 저자로 이직을 했습니다. 시장의 크기를 볼 때, 고생을 자초한거지요. 드라마 연출은 팀 워크입니다.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글쓰기는 달라요. 오롯이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승부가 납니다.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보는 건 주인공의 얼굴과 작가의 이야기지만, 책에는 적어도 나의 생각이 실립니다. 협업의 시대, 마지막 남은 1인 작업이 글쓰기입니다.
강원중의 전설이었지만, 민사고 입학 후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고 해요. 전국의 전교 1등들이 모인 학교에서 다시 전교 1등을 하기란 쉽지 않지요. 공부라면 날고 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전범선 님은 자신의 특기를 고민합니다. 그러다 민사고 시절에 밴드도 만들고, 아이비리그 유학 시절에 디제잉도 하며 딴따라로 다시 태어나죠. 1등을 놓고 다투는 공부는 한 명의 전교 1등과 무수한 그외 나머지를 만들지만, 창작 활동은 경쟁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글이나 음악, 미술로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나 승자가 되는 게임이에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노래상을 받았다는 전범선 저자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유튜브에서 찾아봤어요.
아우, 진짜 멋지지 않나요? 저 북 치는 자세 좀 보세요. 삘 충만한 딴따라입니다. ^^
문득 궁금해집니다. 축구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이 분은 어떻게 강원중의 전설이 되었을까? 책에는 그 비결이 소개됩니다.
'학교 시험 잘 보는 법은 단순했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 시중에 나와 있는 문제집을 모두 구입했다. 춘천 서점에는 출판사별로 약 열두 가지가 있었다. 비용이 꽤 들긴 했지만 학원비보다는 저렴했다. 시험 한 달 전부터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과목별로 문제집 열두 권을 풀고 나면 문제 유형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학교 선생님들도 문제집을 참고해서 약간 변형된 문제를 냈다. 나중에는 특정 문제가 어느 문제집에 있었던 건지 알아볼 정도로 나는 내신이라는 게임에 숙달했다.'
(28쪽)
와, 정말 대단하지요? 중학생이 이걸 스스로 깨달았다는 건데... 놀랍네요. 특목고 정보를 알아보려 중2 때 어머니와 함께 대치동을 찾아갔는데요. 2005년 당시 학원가에서는 민사고 준비반이 가장 경쟁률이 높았대요. 강원중의 전설이라고 자부했던 저자는 부모님께 민사고에 가겠다고 선포하고요. 부모님들은 아들이 민사고를 간다는 말에 당황합니다. 부모님은 저자에게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고, 오히려 아들이 욕심을 낼수록 부담스러워했다고요. 부모가 민사고를 강요하면, 중학생 아들은 괜한 반항기가 들어 공부를 멀리 합니다. 자신이 직접 선택했으니 최선을 다하게 되는 거지요. 전설이 되는 비결은 결국 자기 주도 학습 아닐까요?
민사고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와 영국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전공한 전범선. 책방 '풀무질'을 운영하고, 출판사 '두루미'의 발행인으로 일하며, 해방촌에서 채식주의자로 삽니다. 91년생 저자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 각자 조각배처럼 둥둥 떠서 목적 없이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민주화 이후 태어난 우리는 반도 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며 자랐다. 속된 말로 “배가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목이 마르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 정해준 길이 불만족스럽다. 기성세대의 근대적 가치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민족, 국가, 종교, 기업 등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나름 삶의 뜻을 설정해보지만 정답이 없다. 불안하다. 부유하는 이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른다. (...)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제각각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발길질이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있다. 성 정체성, 민족 주체성, 종교 신앙 따위의 관념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한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는 ‘엔(N)포 세대’가 아니다. 결혼, 집, 출산, 경력 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게 아니다. 나름의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표류와 부유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구조해주는 게 맞지만, 후자는 내버려두는 게 좋다.
부유 세대는 침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떠다닌다.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아와 비아의 경계를 넘나든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정처 없는 유랑길에 목적지란 있을 수 없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도 없고 천국이나 극락도 없다. 하루하루 의미를 찾아가는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적 존재다. 고양이의 표정에서, 잠깐의 산책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에서 이유를 얻는다. 오늘 당장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대성공이다.'
(책 131쪽)
91년생 저자의 책을 읽으며, 68년생 아재가 배움을 얻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또 한걸음 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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