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동안, 저의 독서 친구는 중학교 2학년인 둘째 딸 민서였어요. 아이의 책 읽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제가 하는 일. 제가 읽은 책을 아이에게 권해주는 대신, 아이가 읽은 책을 제가 따라 읽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아이와 함께 나누는 좋은 방법이지요. 민서가 먼저 읽고 재밌다고 제게 권해준 책이 있어요.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지음 / 홍한결 옮김 / 윌북)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더 한 바보들도 많더라고.' 책을 보니 인간의 바보짓 플레이가 릴레이처럼 나옵니다. 그 첫번째 사례. 

'9세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12쪽)  

인간은 멍청한 짓을 반복합니다. 애초에 진화라는 과정이 영리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 진화랍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 뇌는 자기 오류를 깨닫는 것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확증 편향'으로 자기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다른 정보는 외면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요.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무렵, 유럽과 아시아간의 해상 교역로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콜럼버스는 인도를 간다는 게, 실수로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배를 띄울 때, 콜럼버스는 2개의 계산을 하는데요. 하나가 지구의 크기요, 또 하나가 아시아의 크기입니다. 일단 그는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했고요. 그래서 미대륙이 아시아의 일부인 줄...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는데요.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 (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아랍 마일 (약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157쪽)

유럽 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4분의 3으로 착각한 콜럼버스.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어요. 주위에서 하나같이 '자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고요.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에 신대륙을 만나지 못했다면 망망대해에서 굶어죽을 뻔 한 거죠. 콜럼버스의 실수로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요. 그렇게 시작된 식민제국주의 역시 인간의 흑역사 중 하나입니다. 아메리카가 식민화된 후 약 100년간, 인구의 90퍼센트가 질병, 폭력, 강제 노동으로 죽었다고 하니까요. 그런 악행을 저지르면서 어떻게 유럽 제국은 뻔뻔하게 돈을 벌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간은 그럴듯한 스토리와 망상을 동원하여, 자신이 실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속이는 지집요한 본능이 있다. 제국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현재를 신화화하고 그 과거를 윤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164쪽)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에 개그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독특한 책인데요. 시니컬한 저자의 글맛을 살린 번역이 참 좋았어요. 번역자 홍한결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려고요.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외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신 분. 쉽게 읽히고 오래 두고 보고 싶은 책을 만드는 게 번역가로서 소망인데요. <인간의 흑역사>가 딱 그래요.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요. 잠자리에 누웠다가 낮에 한 실수가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며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할 때가요. 그럴 땐 <인간의 흑역사>를 읽어보세요. '난 왜 이렇게 멍청할까?' 자학하고 싶을 때, 위로가 되는 책이어요. 역사 속 위인들도 알고보니 실수투성이... ^^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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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마리 2021.12.01 06: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가 읽고 권하는 책을 따라읽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쉬워질까요? 흑역사를 보고 있자니 요즘 읽고 있는 돈키호테가 떠올라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누군가에게는 흑역사여도 자기 자신에게는 멋진 모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2. 보리랑 2021.12.01 0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댓글! 와~ 아이가 읽은 책을 내가 읽기. 최고의 사랑이네요~~ 요즘 역사 공부 중인데 저도 읽기목록에 추가입니다. 현재는 <한국사편지>가 제 수준입니다. 😅

  3. 아리아리짱 2021.12.01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작가님 아리아리!

    우와~~
    중2따님과 책친구~~
    멋지십니다.
    (그 무섭다는 중2 ㅋㅋ)
    저도 손녀와 책친구 되기의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읽기의 즐거움을 비할 때가 없음을
    새록새록 느낍니다.

  4. 짠직 2021.12.01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딸이 5살 유치원생이어요
    종종 하는 말은 '이 땍 읽어줘어 X 2'
    지금은 딸에게 제가 권하는 책 읽기 활동이여요
    책바꿔 읽기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겠죠!

  5. sara_yun 2021.12.01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인은 실수투성이 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저도 모두 실수투성이니까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다른사람의 실수에 신경이 곤두서는 부분이 있어요! 오늘도 배워갑니다~~

  6. 김주이 2021.12.01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엄청 위안을 받겠는데요^^
    책 담아갑니다.
    실수에 좌절하지 않고 위축되기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 유튜브 창작동화채널 2021.12.01 2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이불킥하다가 작가님 글 보고 위안을 얻습니다.

  8. 게리롭 2021.12.02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돌아오신겁니까 김민식피디님 Well come back!!!!!!
    피디님의 블로그에 와보니 포스팅된 글들이 절 기다리고 있었네요
    좋은글들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

  9. 아프리칸바이올렛 2021.12.02 1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딸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행복씬입니다
    더욱이 딸이 재밌다고 추천해주는
    책을 보는 모습 그야말로 므흣!!
    이불킥 하고 싶은 날 읽을 때으로
    제목 저장합니다

  10. 섭섭이짱 2021.12.03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흐흑...이불킥 자주하는 저한테 딱 필요한 책이네요.
    이 책 읽으며 위로를 받아야겠습니다.

    홍한결.. 홍한결...어디서 많이 본 이 느낌적인 느낌은...
    역시나!!! 책 리뷰 맛집 공즐세와 꼬꼬독에 소개된 책의 번역가 셨네요.

    <걸어 다니는 어원사전> (마크 포사이스 / 홍한결 / 윌북 )
    ( https://free2world.tistory.com/2637 )

    번역가 얘기는 잘 안하시는데 이렇게 얘기를 하시니
    홍한결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이 채도 장바구니에 고고고

  11. 꿈트리숲 2021.12.06 17: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가 들어도 뻘짓하며 이불킥 할 일들이 종종 생기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거군요 ㅎㅎ 인간의 흑역사는 계속 반복될지니 '난 왜그럴까' 하며 자신을 너무 자학하진 말아야겠어요. 남들도 잘밤에 이불킥한다고 위안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