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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외로움은 인생의 상수

by 김민식pd 2021. 11. 26.

어려서 나는 왜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했을까요? 20대의 저는 많이 외로웠어요. 공대를 다녔지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과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첫 직장에도 적응하지 못해 금세 나왔고요. 그런 제게 레트 버틀러는 참 쿨해 보였어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고 집에서 쫓겨난 남자. 상류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외톨이. 그런데 그는 외로움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어요.

모두가 전쟁의 광기에 빠져 남군의 승리를 점칠 때, 혼자 입바른 소리를 합니다. "북부에는 공장이 있고, 남부에는 농장이 있어요. 북군이 공장에서 만든 총과 대포로 쳐들어올 때 여러분은 면화솜으로 총알을 막을 건가요? 그 잘난 남부의 자존심이 여러분의 목숨을 지켜줄까요?"

20대 시절의 저는 버틀러의 반골 기질에 반했어요. 무엇보다 부러운 건, 스칼렛 오하라를 향한 그의 사랑이었어요. 스칼렛이 애쉴리를 사모하고, 심지어 애쉴리의 처남과 결혼하고, 나중에 돈을 위해 마음에 없는 재혼까지 하지만, 버틀러는 항상 스칼렛의 곁을 지켜요. 물론 스칼렛은 그런 버틀러에게 냉담하기만 하지만요. 버틀러의 유들유들한 구애와 스칼렛의 독설이 이어지는데요. 완전 단짠 로맨스입니다.

어렸을 때, TV 명화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어요. 두 남녀의 밀당이 이어지다 영화 마지막에는 결국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를 뒤로 남겨두고 홀연히 떠납니다.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제목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남자 주인공에 대한 말인줄 알았어요. 20대에 원작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남부 문명이라는 것을.


영화 초반부에 이렇게 자막이 나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문명이 있었으니...' 유럽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들이 흑인 노예를 부리고 목화밭을 가꿔 부를 일구고 유럽 귀족들의 삶을 본 뜬 상류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영화 초반부에는 화려한 사교계 파티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남북 전쟁의 패배와 노예 해방으로 결국 몰락하고 맙니다. 소설의 탄생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저자 마거릿 미첼은 1900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되려고 대학에 입학했으나, 1919년에 창궐한 인플루엔자로 어머니를 잃어요. 100년전의 그 유명한 스페인 독감입니다. 결국 그녀는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오빠를 보살피며 집안일을 맡아요.  지역 신문사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3년에 걸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성합니다. 정작 본인은 책이 출판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1936년 친구의 권유로 출간된 책은 6개월 만에 1백만 부가 넘게 팔리고 영화로도 대박이 나지요. 저자가 1949년 교통사고로 생을 마치는 바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데뷔작인 동시에 유작이 되었어요.

저자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요.

'소설의 주제는 생존이다. 재난을 만나도 쉽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 있고 강하고 용감한데도 굴복하고 마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격변에서 그렇다. 살아남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의기양양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특징이란 무얼까?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말하는 〈불굴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 뿐이다. 그래서 불굴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마거릿 미첼

남북 전쟁의 패배로 스칼렛의 고향 타라 농장은 폐허가 됩니다. 폐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식구들을 먹여살리려고 장녀인 스칼렛은 동분서주합니다. 저택을 뺏길 위기에서 세금 낼 돈을 마련하느라 제재소를 운영하는 남자와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해요. 원래 그는 여동생에게 청혼을 했는데 말이지요. 직접 나가서 가게를 운영하고 점령군인 북군들에게도 목재를 팔아요. 악착같이 사는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합니다. 스칼렛이 설움에 복받쳐 레트에게 푸념을 하지요.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느냐고. 버틀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지려던 노력뿐인데, 그렇다면 약간의 성공을 거둔 셈이죠. 전에도 내가 얘기했었지만, 그건 어느 사회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확실한 죄랍니다. 유별나면 저주받게 마련이에요! 스칼렛, 당신이 제재소 운영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성공하지 못한 모든 남자에 대한 모욕이에요. 기억하시겠지만, 점잖은 여자가 머물러야 할 곳은 가정이지, 이런 분주하고 잔혹한 세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 돼요.」

  「하지만 만일 내가 집 안에만 머물러 지내려고 했다면, 나에게는 머무를 만한 집조차 아예 없어졌겠죠.」 

이런 동양 속담을 들어 봤습니까? 〈개가 짖어도 행차는 지나간다〉는 말이요. 남들이야 짖건 말건 그냥 내버려 둬요, 스칼렛.」

  「하지만 내가 돈을 조금 번다고 해서 왜들 그렇게 못마땅해하나요?」

  「사람이란 무엇이나 다 소유하기가 불가능해요, 스칼렛. 지금처럼 숙녀답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면서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쌀쌀한 눈초리를 받든가, 아니면 가난하지만 품위를 지키고 살면서 친구를 많이 두든가 양자택일을 해야죠. 당신은 선택을 했잖아요.」

  「난 가난하게 살지는 않겠어요.」 그녀는 재빨리 대꾸했다. 「하지만 ─ 그건 올바른 선택이겠죠, 안 그래요?」

  「만일 당신이 가장 원하는 목적이 돈이라면, 그렇죠.」

  「그래요, 난 무엇보다도 돈을 원해요.」

  「그렇다면 당신은 불가피한 선택을 한 셈이죠.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부분의 대상들이 그렇듯이, 여기에도 형벌이 따르게 마련이에요. 그건 외로움이라는 형벌이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 - YES24

1939년 퓰리처상 수상, 미국 문학사상 최고의 이야기꾼! 미국 출판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훌륭한 줄거리만 마련된다면 문체는 중요하지 않다. - 마거릿 미첼미국 최고의

www.yes24.com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굶주림에 지친 스칼렛이 밭에서 감자를 캐어 먹으며, "내 다시는 굶주리지 않으리라!"하고 맹세하는 장면이에요. 악착같이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요. 그 때문에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고요. 아프다고 시종일관 누워있는 동생은 얌전한 아가씨라고 칭송을 받습니다. 스칼렛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지요. 레트는 이렇게 위로를 해요.

"이걸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유별나게 행동하면, 당신은 같은 또래의 사람들뿐 아니라 부모의 세대와 자식들 세대로부터도 고립됩니다. 그들은 절대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충격을 받아요. 메리웨더 부인과 그들의 알량한 자식들이 지금 당신을 용납하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당신 자식들도 당신을 납득하지 못하리라고 난 확신해요. 강인한 개성을 가진 사람의 자식이 보통 그렇듯이, 당신 아이들은 아마도 연약하고 새침한 성격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더욱 나쁜 일이지만, 다른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이 당신은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아이들은 절대로 겪지 않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게 다 잘못된 생각이에요. 고생은 인간을 만들기도 하고, 꺾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식을 건너뛰고 손자들에게 인정을 받게 될 날을 기다려야만 해요."


한국 전쟁이 끝나고 전후 세대 중에는 다시는 굶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 악물고 돈을 모은 사람들이 있어요.  고생 끝에 부를 일구었지만, 정작 가족은 고마움을 몰라요. 지독한 수전노인 아버지와 남편 때문에 고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남들처럼 넉넉하게 누리지 못한 데 대해 원망만 가득하지요.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에게 용돈도 넉넉하게 주고 유산도 남기겠지요. 과연 손주가 그 고마움을 알까요? 조부가 그 돈을 모으려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 모르는데 말이죠. 훗날 손자들에게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건, 레트의 다정한 위로인 겁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깨달았어요. 내가 좋아한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견뎌야했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한 선택으로 인해 때로는 외로움이라는 결말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쩌면 외로움은 시련이 아니라, 누구나 안고 가야하는 친구인지도 몰라요.

저자인 마거릿 미첼의 삶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팬데믹으로 어머니를 잃고, 의대 공부를 포기하고 낙향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불굴의 의지로 시련을 극복하는 고독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써나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에도,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것, 그 속에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

언젠가 나이 60이 되면 다시 읽고 싶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때 이 책은 또 어떤 깨달음을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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