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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첫 만남

by 김민식pd 2021. 11. 22.

94년의 첫 만남

1994년 봄,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저는 참 우울했어요. 치과를 돌아다니며 하는 외판 영업은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입니다. 바쁜 치과 원장님을 상대로 영업활동을 하는 것도 힘든데, 당시 모시던 상사와 성격이 맞지 않아 참 힘들었어요. 힘들 땐 무엇을 할까요? 그나마 자신있는 일을 하며 자존감을 삶의 의욕을 고취시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종로 외국어학원이었어요. 

대학 시절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에 자신이 있었기에 접수대에서 물어봤죠. "이 학원, 최고 레벨 영어 수업은 뭐죠?" "통역대학원 입시반입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교육비로 학원 등록을 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공짜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 퇴근하면 여의도에서 전철을 타고 종로로 달려가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하는 수업을 들었어요. CNN 뉴스를 청취하고, TIME지 독해도 하고, 문법책 예문 외우기 등을 했는데요. 수업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스크린 잉글리시', 즉 영화를 보며 청취 훈련을 하는 시간이었어요.

한민근 선생님은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틀어주셨어요. 영화를 보고, 받아쓰기를 하는데요. 1800년대 미국 남부 사투리는 받아 적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는 꾀를 부렸습니다. 원작 소설을 찾아 읽은 거지요. ^^ 영어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알아듣기 쉬워지거든요. 원작의 분량이 어마어마했어요. (미국에서 첫 출간 당시 1037쪽!) 러닝타임이 4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인데, 그나마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축약을 한 거예요. 영화도 재밌지만, 소설은 더 재미있었어요. 

 

94년 당시, 평일에 직장 생활을 하는 건 너무 괴로운데, 주말에 도서관에 앉아 영어 소설을 읽는 건 정말 즐거웠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있어야할 곳은 도서관이로구나. 미련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돈을 적게 벌어도 좋으니, 남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다행히 통대 입시반 수업에서 '잘한다'는 평가를 들어 자신감을 얻기도 했고요. ^^  

대학원 합격 후, 동시통역 스터디를 하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땐 영어 소설을 펼쳤어요. 1년에 100권 정도 페이퍼백을 읽었는데요. 스티븐 킹이나,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저자도 좋았지만, 3권의 소설이 기억에 남아요. 

Gone With the Wind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The Godfather (대부)

The Fourth Protocol (제4 의정서)

앞의 두 작품은 영화로도 유명하지요. 영화를 재미나게 보셨다면, 꼭 원작 소설을 찾아보세요. 저는 번역판으로도 읽고, 원서로도 읽고, 미국에서 나온 영어 오디오북으로도 읽었어요. 머리가 나쁜 탓인지,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재밌어요. 3번째 소설은 생소하실 거에요. 한국에선 1980년대 <제4의 핵>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책입니다. 1990년대 프레드릭 포사이드는 냉전시대 첩보물을 그리는데 탁월한 작가였어요. 어려서 007영화 시리즈를 좋아하던 제가 20대에 그를 발견하고 그의 소설을 출간되는 족족 다 사서 모았지요. 영어 소설을 읽으며 독해 실력을 키웠고요. 96년에는 SF 소설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어요.

영어 소설을 읽으며 통역사를 꿈구던 20대 청년이 이제 나이 쉰 넷의 은퇴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책에 많은 것을 빚진 인생입니다. 매년 200권 넘게 책을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렸어요. 독서의 재미와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그러다 작년 말에 깨달았지요. '공부가 부족한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았구나. 말과 글을 좀 줄여야겠다.' 블로그를 쉬고, 책 소개 유튜브도 그만뒀습니다. 

블로그 휴업에 들어가자 한동안 멍했어요. '이제 나, 뭐하고 살지? 회사도 그만뒀는데?'

문득 20대의 제가 떠올랐어요. 회사를 그만 둔 그 시절의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으며 즐거웠어요. 20대에 읽어 재미난 책은 50대에 읽어도 좋지 않을까요? 블로거로서 저는 사적인 즐거움보다 공적인 의무를 추구했어요. 매년 쏟아져나오는 신간 중에 좋은 책을 찾아 블로그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지 않으니, 당분간은 재미로 책을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고독한 은퇴자의 독서 일기, 첫번째 책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21년도판 리뷰의 프롤로그입니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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