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퇴사의 이유

by 김민식pd 2021. 11. 15.

사람은 언제 잘못을 저지를까요? 세상은 바뀌었는데, 세상 살아가는 규범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을 때입니다.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직장에서는 꼰대가 되고, 사회에서는 '개저씨'가 됩니다. 지난 1년 동안, 독서에 있어 저의 숙제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저는 30대 저자들이 쓴 책을 찾아읽었습니다. 그중에는 <추월의 시대>가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한국 사회는 ‘추격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추격자에게는 앞서가는 선발주자가 있지요. 70대가 된 산업화 세대에게는 미국이 추격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 그 일념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50세를 넘긴 민주화 세대에게는 유럽이 지향점이었습니다. ‘우리도 유럽처럼 복지국가를 만들자.’

젊은 청년 세대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할아버지뻘인 산업화 세대와 아버지격인 민주화 세대가 맞서 싸우는 형국입니다. 추격의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보수는 진보를 향해 ‘종북좌파 빨갱이’라 손가락질하고, 진보는 보수를 일컬어 ‘토착 왜구 독재 잔당’이라 합니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둘 다 시대착오적인 언사예요. 냉전이 종식된 지 언제고, 독재가 끝난 지 언제인데.

기성세대가 롤모델로 삼는 미국과 유럽은 코로나가 터지자 크게 타격을 입었습니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그 선진국이 맞나? 이미 몇 년 전,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이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습니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인 줄 알았더니,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싫다고 하네? 유럽연합이 미래의 대안인 줄 알았더니, 영국은 그 공동체에서 탈출하고 있네? 코로나-19 이후 한국은 방역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고, 자신감을 얻었지요. 추격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추월의 시대입니다. 추월의 시대에는 롤 모델이 없어요. 베껴 쓸 모범답안이 없으니, 이제 우리 자신이 새로운 답안을 내놓아야 합니다.

책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기성세대 여러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역군들 덕분에 굶주리던 나라가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화 시대의 투사들 덕분에 정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경제 발전도 이루고 정치 민주화도 일궜으니, 여러분은 역사적 소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이제 물러나 여생을 즐기시면 됩니다.”


<추월의 시대> 책 곳곳에는 저자 사진이 나옵니다. 30대 저자들이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죠. 그들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 20대, 30대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고, 역사상 최악의 취업 경쟁을 통해 단련된 젊은이들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이제 저희에게 맡겨주시고, 선배님들은 쉬세요.’

저는 전형적인 ‘추격의 시대’형 인간입니다. 20대에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즐겨 봤고, 30대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형 청춘 시트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40대가 되어, 우리도 선진국처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방송사 노조 활동을 했고요. 회사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시대적 소명을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물러나도 되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한국 사회를 진단한 또 다른 책에 <세습 중산층 사회>가 있습니다.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다소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노동시장에서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 50대인 그들에 대한 대규모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80년대 학번의 선배들인 고참 관리자들이 대거 정리해고됐던 것처럼 현재 50대 중반 정도로 생산성보다 훨씬 더 많이 급여를 받아가는 80년대 학번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젊은 20대로 채우는 게 정부, 공공기관, 기업 입장에서 차라리 더 효과적이고 작동 가능한 해결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채운 20대들부터 직무급을 도입한다면 대규모 채용과 임금 구조 개편을 맞바꿀 수도 있다. 조직 전체의 임금 구조 개편은 어렵지만, ‘신참’을 대상으로 국한시킬 경우 성공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표를 쓸까 고민할 때, 회사의 후배들을 떠올렸어요. 24년간 MBC를 다니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제가 만난 후배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정의로웠어요. 그들이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을 모범답안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MBC가 정치적으로 힘들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저도 힘들고, 다들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힘들 때, 혼자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버텨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이제 회사가 힘겹게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힘들지요. 하지만 지금 닥친 고난은 신뢰의 위기가 아니라 시장의 위기입니다. MBC가 당면한 가장 큰 시련은 기술의 변화와 미디어 시장 개편에서 옵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답은, 새로운 세대가 내놓을 것입니다. 저의 역할은 끝났다고 느꼈으므로, 마음 편히 사직서를 쓸 수 있었어요.

세상에서 물러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남은 평생, 저는 책을 읽으며 지낼 것입니다.

젊은 세대가 쓴 책을 읽으며, 세상의 변화를 공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