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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고독을 선택한 이유

by 김민식pd 2021. 11. 10.

2013년 무렵, 저는 참 외로웠어요.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파업에 앞장선 후, 정직 6개월, 대기발령, 교육발령 등 징계를 받았지요. 경영진에 미운털이 박혀 피디로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읽은 책이 있어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2005년에 나온 책인데요. 부제가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였어요.

저자이신 최재천 교수는 이 책에서 고령화 사회란 모두가 외로워지는 세상이라고 하셨어요. 직장을 나와 은퇴 후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부부가 같이 해로하면 좋겠지만, 초고령 시대에 누군가는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노후에 홀로 지내는 시간도 길어져요. 긴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삶을 이모작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아가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어요.

수렵채집부터, 농업, 공업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협업으로 먹거리를 구했어요. 사냥과 채집활동은 운의 영향을 받죠. 먹을 게 남으면 나눠주고, 부족하면 얻을 수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농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땅을 개간하는 것부터 모내기와 벼 베기 등 전부 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현대의 공장이나 사무실 노동 역시 마찬가지죠. 철저하게 전문화된 분업과 협업으로 결과물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움을 고통으로 느끼는 방향으로 진화했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늘 단체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으로 상처를 받았고, 커서는 직장 생활이 힘들었어요. 스물 다섯 살에 들어간 첫 직장에서는 2년도 못 버티고 나왔습니다. 그때 상사가 붙인 별명이 '아메리칸 스타일'이었어요. 개인주의자라는 비난이 담긴 별명이지요. 나이 50이 넘어도 사람들과 부대끼는 건 여전히 힘들어 술 담배 커피를 피하고, 퇴근 후 혼자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만난 책이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고요.


고령화 시대에 홀로 버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 끝에 1인 생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회사가 업무를 줘야만 일할 수 있는 드라마 피디 말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찾은 일이 작가입니다. 2020년 초고령사회가 올 때까지 매일 글쓰기를 훈련해 작가로서 인생을 이모작하자고 결심했어요. 그게 블로그를 열고 글쓰기에 매진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10년 동안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올렸어요. 2017년에 낸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가 운 좋게 베스트셀러가 되고 2018년에는 드라마 피디로 복귀했습니다. 피디로서 연출을 재개하고, 저자로서 강연도 하고, 유튜브까지 했습니다. 인생 이모작을 하려다 삼모작, 사모작을 하게 된 거죠.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제 병충해로 벼가 시들어도(드라마 연출로 망해도) 밥 굶을 걱정은 없다. 감자(칼럼 기고)도 있고, 고구마(출판)도 있고, 약재 식물(유튜브)까지 키웠으니까.' 노후 준비는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태풍이 몰아닥쳤습니다.


2020년 11월에 신문에 낸 글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거센 역풍이 되어 휘몰아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저는 뭔가에 씌었나봐요. 어쩌다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요? 타인에게 상처 주는 글을 쓰는 괴물이 되었을까요? 남은 평생 두고 두고 반성하며 살아도 그날의 잘못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예전에 노조 집행부로 일하며 싸울 때, 온라인상에서 욕을 좀 먹었습니다.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소리도 듣고 ‘저놈의 목을 치라’는 험한 소리도 들었지요. 그래도 힘들지 않았어요. '나쁜 놈들이 하는 말은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저들이 소리 높여 나를 욕하는 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라고 마음을 추스리며 계속 싸웠습니다. 하지만 2020년에는 달랐어요. 좋은 사람들이 선한 의도로 나를 비난하는 글은 상처가 되더군요.

블로그에서도 저에 대한 원성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의 댓글을 남긴 분들도 계셨습니다. ‘피디님,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 글이 다시 분노를 불러왔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몰라? 어떻게 이런 사람을 편 들 수 있는 거지?’ 누군가 나를 응원한다면 그 사람까지 욕을 먹는 상황이었어요.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싸우는 형국이 된 거죠. 저의 잘못으로 인해. 그때 결심했습니다. 철저히 외로워지기로.

인생 이모작을 한답시고 오랜 시간 가꿔온 텃밭을 내 손으로 갈아엎었습니다. 24년째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10년째 매일 글을 올리던 블로그를 중단했어요. 몇 년째 연재하던 신문 칼럼을 접었습니다. 한창 재미를 들인 유튜브 독서 채널 진행도 그만뒀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어쩌다 나는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사람이 된 걸까요? 뼈저린 반성이 필요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철저하게 외로워져야 한다고 느꼈어요. 어설프게 내 편을 모아 상황을 모면하려다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부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통증의학 전문의인 오광조 선생님은 <외로움은 통증이다>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 잘못을 알고 고치는 반성은 성장에 꼭 필요하다. 그러나 반성에 머무르면 자책이고 반복되면 자학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뉘우치며 사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 글쓰기로 고민을 이어가려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사람이 될까봐 여전히 두렵습니다.

반성을 통해 성장하는 삶을 꿈꾸기에, 다시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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