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예능 피디로 일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리얼리티 프로는 진짜 리얼인가요?” 답변하기 참 난감하다. 세상 모든 것을 진짜와 가짜, 둘 중 하나로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나쁜 짓도 살짝 하는 좋은 사람일까, 남들이 볼 때만 좋은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일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로 찍는 순간, 출연자가 하는 행동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남이 찍은 내 사진을 보면 화들짝 놀란다. ‘누구세요?’ 내가 찍은 셀카와 우연히 찍힌 모습은 사뭇 다르다. 카메라를 의식할 때, 나는 최대한 선한 표정을 짓는다. 부지불식중에 찍힌 사진을 보면, 탈모가 심하고 배 나온 아저씨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 ‘헐? 사람들이 보는 평소 내 모습은 이런 거였어?’ 그동안 난 셀카에 속고 살았다.
요즘 사회적 관계망에 바디 프로필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와, 저게 배야, 빨래판이야.’ ‘헐! 저 나이에 저 몸매가 가능해?’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울해진다. 다들 나보다 잘 지낸다. 밥은 맛집에서 먹고, 커피도 핫플레이스에서 마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선남선녀다. 페친들의 근황에 비해 내 삶은 얼마나 비루하고 초라한가. 혼자 우울하고 말면 그나마 다행이다. 좌절은 때로 분노가 된다. 주식으로 돈을 벌어 ‘플렉스’했다는 친구의 새 차 사진에는 이 악물고 ‘좋아요’를 누른다. 그러다 애꿎은 연예인의 근황 기사에는 분노의 댓글을 단다. “돈 많은 부모 만나 외제차도 타고 좋겠네.” “저거 다 성형빨인거 아시죠?”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캐스팅이라니, 피디가 돈 먹은 듯.”
분풀이 할 대상을 찾아 온라인 뉴스 세상을 헤맨다. 각자의 우울이 모여 다수의 분노가 된다. 뉴스는 가짜라도, 분노는 진짜다. 현실을 도피한 이들의 사이버 테러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등지는 이유가 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열 명인데, 그중 한 두 명이 나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나쁜 거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다 나쁜 놈이라면, 내가 나쁜 거다. 무분별한 분노에 물드는 순간,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이 된다. 우울에 중독되고, 분노가 전염되는 스마트폰의 시대,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이 생기면, 나는 휴대전화를 끄고 산을 오른다. 혼자 묵묵히 걷는다.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니 바위틈에 뿌리내린 나무가 보였다. 하필 흙도 없고 물도 없는 바위틈에 자리를 잡았다니 네 팔자도 참 박복하구나. 부드러운 흙이 있고, 뿌리 옆으로 물이 흐르는 숲에 사는 나무가 얼마나 부러울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 ‘나무도 질투를 할까?’
식물의 씨앗은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선택할 수 없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든, 새똥에 섞여 떨어지든, 그냥 떨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잎을 피운다. 물이 귀하고 흙이 부족한 바위틈에 떨어진 씨앗은 그래서 불행할까? 물 많고 흙 많은 숲에 떨어진 씨앗은 그냥 썩어 죽어버린다. 아름드리 울창한 나무 아래 떨어진 씨앗은 부모의 그늘에 가려 맥을 추지 못한다. 그래서 나무는 기를 쓰고 씨앗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모의 그늘 아래서 자식은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걸 나무는 안다. 맛있는 열매로 씨앗을 감싸 동물을 유혹하거나,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날개를 달아주어 멀리 떠나보낸다. 바위틈에 떨어진 씨앗은 경쟁자가 없는 천혜의 환경을 만난 덕에 살아남았다.
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울창한 가지를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 덕분에 쉬어간다. 빼곡하니 하늘을 가득 메운 이파리들을 보면 겸손해진다. 햇볕 한 줌 놓치지 않으려고 나무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성실한 나무에게 나는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운다.
(어제 소개한 <랩걸>을 읽고 나무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책에서 얻은 배움을 삶에서 얻은 질문에 연결해 써 본 글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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