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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나무를 다시 보게 되는 책

by 김민식pd 2020. 10. 12.

여러분은 추석 연휴 동안 무엇을 하셨나요? 저는 밀린 숙제를 했어요. 오래전부터 읽다 말다, 하던 책을 이번 연휴에 작정하고 완독했어요. 얼마 전 신문에 난 신간 소개 기사를 읽는데, 저자 이름이 '호프 자런'이에요. 낯익은 이름인데, 누구더라? 생각해보니 <랩걸>의 저자에요. 예전에 아내가 산 책인데요. 주간지 <시사인 2017 행복한 책꽂이>에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 번역서부문 1위에 올랐던 책이에요. 주위 평이 다 좋아서 저도 읽기 시작했으나, 분량이 방대해서 읽다가 자꾸 순서가 밀렸어요. 읽고 싶은 책이 자꾸 눈에 띈 거죠. 저자의 신간을 영접하기 전에 출세작부터 봐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읽었어요.

<랩걸> (호프 자런 / 김희정 / 알마) 

이 책은 3개장으로 나뉘어있어요.

1장 뿌리와 이파리

2장 나무와 옹이

3장 꽃과 열매

식물의 생태에 대해 설명하는 과학서적, 그리고 여성 과학자의 자서전,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며 펼쳐져요. 어려서 아빠의 실험실에 매료된 한 소녀가 평생을 과학에 헌신하는 '랩 걸 lab girl'이 된 이야기인데요. 뿌리와 이파리는 과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유년기, 나무와 옹이는 조교수로 연구 활동을 시작한 학자의 이야기, 꽃과 열매는 학문의 성과를 내고 가족을 이뤄가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저자는 교수로 자리를 잡기 위해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는데요. 여성 전문가가 드물던 시절에 과학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그래도 동물이니까 환경이 맞지 않으면 옮겨 갈 수 있지요. 식물은 그렇지 않아요.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81쪽)

그렇죠. 나무는 한번 뿌리 내리면 끝입니다. 사람도 예전에는 그랬어요. 첫 직장이 평생 직장이던 90년대에는. 저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1994년에 제가 일하던 첫 직장 사무실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생각한 순간, 너무나 절망스러웠거든요. 그래서 훌훌 떠났지요. 우리는 식물이 아니라는 점에 감사해야 해요. 움직일 수 있을 때는 과감히 뿌리를 옮겨야 합니다.

'식물이 처음 만들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새 이파리는 새로운 개념이다. 씨는 닻을 내리자마자 우선순위를 바꿔, 모든 에너지를 위로 뻗어올라가는 데에 집중한다. 보유하고 있던 영양분은 거의 다 바닥이 났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연료를 확보하려면 빛이 절실하다. 숲에서 가장 작은 식물이니 자기 위에 있는 모든 식물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내내 그늘이라는 비참한 환경까지 견뎌야 한다.'

(96쪽)

그늘이라는 비참한 환경을 견디는 건,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어요. 외국어든, 운동이든, 그림 그리기든, 처음 시작한 사람은 잘하는 사람과의 격차가 너무 커요. 그래서 쉽게 기가 죽고 포기하게 되죠. 울창한 나무를 보고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나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거죠. 이 책을 읽고 나서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나 잡초가 달리 보여요. 빼곡히 하늘을 채운 나무잎이 증명하는 건 나무의 열정이죠. 햇빛 한 줌 놓지지 않으려는 그 치열한 자세.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은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나는 위에서 오는 빛,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다. 두 식물 사이의 경쟁은 한 가지 동작으로 결정된다. 더 높이 뻗는 동시에 더 깊이 파고 드는 것. 이런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참가자에게 목재가 얼마나 큰 무기가 될지 생각해보라. 빳빳하지만 탄력성이 있고, 강하지만 가벼운 물질이 이파리와 뿌리를 따로 분리시키고 지탱해주는 장점을 지니는 것이 바로 목재다. 그렇게 해서 나무들은 햇빛과 물을 향한 경기에서 4억 년 이상 압도적 승리를 거둬왔다.'

(116쪽)

과학적 사실을 참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합니다. 더 높이 뻗는 동시에 더 깊이 파고 들기 위해 나무는 단단한 몸통을 만들고요. 그 덕분에 우리는 목재라는 가볍고 튼튼한 건축자재를 얻지요. 식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었겠지요.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감사하는 건, 나무 덕분에 종이가 만들어지고 책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나무에게 참 많은 것을 빚지고 사는군요.   

책을 읽고 나면 나무가 달리 보입니다. 나무의 성장도 멋지고, 과학자로서 저자의 성장 과정도 감동적이에요. 과연 2017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될 만한 역작이네요. 기나긴 연휴 덕분에 이제라도 이 책을 완독한 게 다행입니다. 오늘은 산책길의 나무에게 배우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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