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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자주 많이 웃는 게 성공이다.

by 김민식pd 2020. 9. 29.

나이 70에 한글을 배우는 칠곡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 <칠곡 가시나들>. 할머니들이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의외의 장애물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자식들이랍니다. 말리는 아들 딸이 그렇게 많대요. 

"에이 엄마, 힘들게 그걸 왜 해요. 스트레스만 받지."

"아빠 거기 가지 마시라니까. 추운데 넘어지면 큰일 나요."

"참 엄마도 주책이다. 그분들이랑 같이 다니지 마세요."

서울에서 젊은 사람들이 카메라 들고 내려와 촬영한다니까, 이상한 약장수들이 시골 할머니한테 사기치려고 그런다는 자녀도 있어요.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김재환 지음 / 주리 그림 / 북하우스)

김재환 감독은 영화 개봉 후 이런 질문을 받았대요.

"오랫동안 할머니들을 지켜보셨는데 우리 시대의 효는 구체적으로 뭐라 생각하세요?"

"효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겠지요. 할머니들에게 제일 필요한 건 자녀들의 전화와 에너지를 주는 리액션이더군요.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 그런데 나이 든 부모님들의 설렘을 가장 방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자녀들입니다."

(53쪽)

이 대목을 읽다 문득 생각했어요. 오랜 시간, 자녀들의 설렘을 막은 건 부모겠지요. 

"뭐? 사표 내고 산티아고를 간다고? 아서라, 말아라!"

"지금 네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이건 자녀들의 역습인가요? 설렘을 방해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김재환 감독은 원래 의미있는 사회 고발성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 등등. '재미있게 살고 의미있게 죽자'라는 생각으로 살던 저자는 할머니들과 몇 년을 보낸 후, 생각을 바꿨대요. '재미있는 게 의미있는 거다.'로. 자식이 재미있어 하면, 그냥 하도록 놔둬야 하고요. 부모님도 마찬가지예요. 살면서 가슴 설레는 일을 만날 기회가 그리 흔치 않거든요. 책에는 60넘어 한글 공부를 시작해, 시를 짓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작품이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요. 영화 <칠곡 가시나들>에 나온 시도 반가웠지만, 처음 만난 시도 많았어요. 그중 가장 재미난 시 한 수 올립니다.


'어휴 저 화상 

- 노정임

 

평생 돈을 벌지 않는 저 화상

가장인데 노력하지 않는 저 화상

술 먹고 놀기 좋아하는 저 화상

아이들과 추억이 없는 저 화상

어휴 저 화상

보기만 하면 자꾸 미워지는 저 화상

나와 결혼한 지 어언 38년 저 화상

젊어선 참이슬 마셔대던 저 화상

이젠 건강 생각해서 소주를 막걸리로 바꾼 저 화상

그래도 어쩌겠나 저 화상

나 없으면 불쌍한 저 화상

남은 삶도 으르렁 같이 살아야지 저 화상

(59쪽)

이 시를 들려드리면 할머니들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그 새댁은 화상이라도 있어서 참 좋겠네 하는 소수 의견도 있지만 대부분은 죽은 영감 얼굴 꿈에 볼까 무섭다, 그 새댁이 진짜 제대로 된 화상이랑 안 살아봐서 철없는 소리를 한다며 까르르 하신다고요. 

 

 

<칠곡 가시나들>을 극장에서 볼 때 약간 의아했어요. 1930년대 일제 시대에 나고 자란 딸들은 당시 '가시나가 글 배아서 머할라꼬'하는 소리에 학교도 못가요.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 나이 60이 넘어 문해학교를 다니는데요. 할아버지 중에도 문맹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칠곡 머스마는 없고 가시나들 뿐일까? 할아버지들은 체면 치레 하느라, 문해학교에 안 온답니다. 자신이 무언가 모르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죠. 칠곡에 내려가 몇 년 간 촬영을 하면서 보니 동네 할머니는 공부하러 마을회관에 모이고, 할아버지는 막걸리 가게에 모이더래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공간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어요. 바로 웃음입니다. 마치 할머니들은 살짝 스쳐도 까르르 하고, 할아버지들은 톡 건드리면 버럭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할머니들의 마을회관에는 별일 없어도 웃음이 넘치고, 할아버지들의 막걸리 가게에는 온갖 '썰전'으로 화가 넘쳐요.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게 성공적인 인생이라지요. 웃음기 사라진 할아버지들만의 공간에서 거창하고 공허한 시사토론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건 우리나라 노년 남성들의 집단적인 비극입니다. 엄격한 남녀 구별과 체면, 가부장 문화의 부메랑이 재미없는 인생 마무리란 형벌로 돌아와 고통을 주는 느낌이랄까요.'  

(61쪽)

책을 읽어보니 김재환 감독은 <칠곡 가시나들>을 만들며 '노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란 주제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네요. 책을 읽고 제가 내린 결론은, 늙어서도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자', 즉 책을 읽고 공부를 하자, 고요. 새로운 노후의 꿈이 하나 추가되었어요. 

퇴직 후에, 김재환 감독이랑 둘이서 전국 순회 강연을 다닐 거예요. 자주 많이 웃겨드릴게요.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 대해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이 끝나면 동네 맛집에서 밥을 먹고,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걷기 여행을 즐길 거예요. 김재환 감독이요, 영화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책도 잘 쓰고요, 강연도 잘 하더라고요. 

최근 올라온 김재환 감독의 세바시 강연을 소개합니다. 

 

추석 연휴, 웃음이 함께 하는 명절 맞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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