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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재치있는 잽이 필요한 순간

by 김민식pd 2020. 5. 19.

어느 책에선가 읽었어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 다시 보니, 김'언'수 작가의 작품집이었다고요. 그런데, 이 김언수 작가의 소설도 너무 재미있어서, 실수가 가져온 행운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내용..... 그 글을 읽고 찾아본 책입니다.

 

<잽> (김언수 소설 / 문학동네)

읽어보니 정말 재밌네요. 책을 읽으며 소리내어 깔깔깔 웃었어요. <잽>의 주인공은 권투를 배우려는 고등학생입니다. 억울한 지경에 처했는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길이 없어요. 샌드백이라도 마음껏 두들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권투 도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주먹을 날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줄넘기만 계속 시켜요.

 

'학교를 마치면 나는 매일 8킬로미터를 달렸고 도장으로 돌아와서 30분 동안 줄넘기를 했다. 링에서 뛰는 것처럼 3분 동안 줄넘기를 하고 1분을 쉬고, 다시 3분 동안 줄넘기를 하고 1분을 쉬는 식이었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그려진 발다박 모양을 따라 스텝을 밟거나,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가드를 올리고, 턱을 바짝 당긴 자세로 전진 더킹과 후진 더킹을 하며 주먹을 피하는 자세를 계속 반복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한 마리의 번데기가 꿈틀꿈틀 기어가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두 달 내내 그 자세였다. 관장은 그 자세 하나만을 덜렁 가르쳐주고 주먹을 뻗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뭐든 처음부터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해도 수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바보들은 권투가 주먹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권투는 9할이 풋워크야. 주먹은 그 황홀한 스텝 위에서 장단만 맞추는 거지."하고 관장은 말했다.'

(20쪽)

영어 공부도 제대로 하려면 처음에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초 회화 암송을 통해 영어의 체계를 익히고 난 다음에야 독해나 청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기본기를 익히지 않고 바로 주먹부터 날리려고 하면 스텝이 꼬입니다. 인생사가 다 그렇지 않나요? 관장이 처음으로 가르쳐주는 펀치는 잽입니다. 

 

'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투 자세를 잡더니 허공을 향해 두어 번 잽을 뻗었다. 빠르고 근사한 잽이었다.

"이게 잽이라는 거다. 어깨와 주먹에 힘을 빼고, 툭툭,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니라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내온다는 느낌으로 팔을 뻗는 거야. 툭툭, 스텝을 밟으면서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툭툭, 발의 움직임을 따라 몸에 리듬을 타면서, 툭툭, 상대가 짜증이 나도록, 상대가 초조해지도록, 상대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도록 툭툭, 계속해서 날리는 거야. 그럼 알아서 무너져. 잽으로 다 무너뜨린 다음 한 방에 보내는 거지." ...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사람들은 독기나 오기를 품으라고 말하지. 마치 싸움을 할 때 독기를 품으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뜨거운 것들은 결코 힘이 되지 않아. 그렇게 뜨거운 것들을 들고 싸우면 다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작 투지는 아주 차갑고 조용한 거지.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툭툭, 방울토마토 하나, 툭툭, 방울토마토 두 개, 툭툭, 방울토마토 세 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관장이 팔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26쪽) 

 

강동호 문학평론가의 글로 책 소개를 마무리합니다.

'진짜 소설은 탄탄한 풋워크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그리고 강한 상대일수록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숨긴 채, 상대의 발에 내 흐름을 맞춘다. 그렇게 내가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 세계가 저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세상이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슬슬 자신만의 리듬으로 풋워크를 하면서 조금씩 잽을 날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소설집을 읽다가 허를 찔리는 순간들은 하나같이 이 소설가가 세상을 향해 재치 있는 잽을 날리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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