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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by 김민식pd 2020. 3. 13.

종종 만나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중, MBC 라디오 장수연 피디가 있어요. 그가 쓴 책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참 좋아하는데, 부지런한 후배가 새 책을 냈어요.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장수연 / Lik-it)

장수연은 라디오 피디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요. 2007년 대학 졸업하고 MBC 공채 면접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집니다. 내심 필기만 붙으면 면접위원들은 자신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가 낙심합니다. 라디오 피디는 뽑는 인원도 워낙 적고 자주 뽑지도 않기에 이제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하나 싶습니다. 시련이 찾아오면 그도 책을 읽나 봐요.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습니다. 취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장편소설을 읽고, 작가의 북토크에 찾아갑니다.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소박하고 따뜻했다.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작가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목소리는 작았고, 사투리 투가 있었고, 이런 행사가 쑥스러운 듯 자주 웃었다. 그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 공간에 흘러넘치는 기운이 너무 좋아서 서러워졌다. 이런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정말 만들고 싶은데....... 질문을 받는 시간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제가 라디오 피디가 꿈인데요, 만약에 진짜 라디오 피디가 되면, 혹시 제가 만드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주실 수 있으세요?” 포기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는데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웃으면서 그러겠노라고 대답해줬다.’

(12쪽)

다음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저자는 다시 MBC 공채 소식을 듣습니다. 기대보단 미련에 가까운 마음으로 접수하고요. 거짓말처럼 최종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고요. 피디라는 직업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상태였지만, 그때 그 소극장에서 "만약에 제가 라디오 피디가 되면..."이라는 말로 가느다란 실 하나를 남겨놓았던 일이 계기였다고 해요.

입사하고 처음 배정받은 프로그램이 <장진의 라디오 북클럽>인데요. 담당 작가와 회의를 하던 중, 김연수 소설가는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섭외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계속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씩 웃어요. "제가 한번 전화해볼게요!" 작가에게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합니다. “혹시 2년 전 대학로에서 하셨던 북토크 기억하시나요?” 독자로 만났던 김연수 작가와 피디가 되어 다시 만납니다.

책을 보니, 여기에는 또다른 사연이 있어요. 김연수 작가의 산문 <소설가의 일>을 보면 작가가 처음 사인회를 했을 때 일화가 나옵니다. 평일 오후라 독자가 없을까봐 출판사에서 저자의 사인을 받으면 책을 할인 판매하는 이벤트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바람에 알바 뛰는 기분으로 사인을 해치웠다고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김연수 작가는 독자 기피증 비슷한게 걸렸답니다. 그 증상을 이겨낸 사연이 있어요. 난생처음 독자와 대화하는 행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들더니 라디오 피디가 꿈이라며 나중에 피디가 되면 꼭 섭외하고 싶다고요.

‘2009년 5월, 그 독자에게서 정말 연락이 왔다. MBC 라디오의 피디가 됐으니 약속을 지켜달라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구나. 그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데, 아, 놀라워라, 내 안에서 벽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 모든 일의 선의를 믿자고 생각하게 됐다. 1994년 서울도서전에서 내 사인을 받은 사람들도 단순히 공짜 책을 받으려는 욕심에 그렇게 긴 줄을 선 게 아니라 젊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줄을 선 것이라고.’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136쪽

 

그래요, 약속이 이뤄지기도 하는군요. 예전에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책이 나왔을 때, 장수연 피디와 김소영 아나운서의 책방에서 북토크를 한 적이 있어요.

(저자의 브런치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

좀 부끄러웠어요. 아나운서 앞에서 피디 둘이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 이번에 장피디와 제 책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기에, 둘이 합동 북토크를 하려고 했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어요....... 흑흑.......

우리 둘 다 사랑하는 지겨움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피디라는 직업도, 독서라는 취미도, MBC라는 회사도, 심지어 저자 북토크 쫓아다니는 것까지.

언젠가 출근길에 책 사진을 올렸더니 누가 요즘 시기에 딱 맞는 제목이라고. 맞아요. 요즘처럼 지겹게 집에서 틀어박혀 지내야 할 때 읽기 딱 좋은 책이에요. 어린 후배지만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생 선배의 얘기를 듣는 기분입니다. 새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봅니다.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은 또 무엇이 있을까?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고 믿습니다. 언젠가 둘이 다시 웃으며 합동 북토크를 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약속이 이뤄지기도 한다는 걸, 우린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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