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나는 자칭 문학소년이었다. 늘 책을 읽었고, 늘 글을 썼다. 백일장에 나가 시를 쓰기도 하고, 연애편지 대필도 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 문학의 길을 접고 이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시화전을 했다. 평소 글 좀 쓴다고 생각했으니, 나도 까불까불 시를 출품했다. 내 시 옆에 반 친구의 시가 나란히 걸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의 시에 가서 꽂혔다. 나는 어설프게 어른들의 시를 흉내내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시는 그냥 탁월했다. 한마디로 차원이 달랐다. '타고난 문재란 저런 거구나!' 나는 그 순간 문학도의 꿈을 접었다.

내게 좌절을 안겨준 그 친구가 바로 소설가 박민규다. 민규와 나는 울산 학성고 동창이다. 고교 졸업 후, 박민규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로 갔고, 나는 한양대 자원공학과로 진학했다. 나에게는 박민규와 같은 문학적 자질이 없으니, 그냥 평범한 엔지니어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내내 나는 글을 앓았다. 전공 공학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늘 소설만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글에 대한 짝사랑의 열정에 굴복했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해서, 좋은 글을 읽는 즐거움마저 버릴 수는 없지않은가. 그 이후 나는 매년 100권의 책을 읽는 행복한 독서광이 되었다.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옮길 수는 있지 않은가. 통역대학원을 다니며 남의 말과 글을 옮겼지만 가슴 한켠 창작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이 설흔에 피디 공채에 지원했다.

96년에는 TV PD를 공통직군으로 뽑았으니, 입사 후 드라마 피디를 지망할 수도 있었다. TV문학관이나 베스트셀러 극장같은 문학 작품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을 꿈꿀수도 있었는데, 문학을 전공하지 못했다는 나의 자격지심이 드라마 대신 예능을 택하게 했다. 하지만 예능을 하면서도 이야기에 대한 짝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들이 이십대 후반에 시작하는 드라마 연출을 나는 나이 마흔에 시작했다. 늦게 가는건 두렵지 않다. 해보고 싶은 일을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해보면 되는 것이다. 주위에서 견제와 타박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꿋꿋하게 견뎠다. 나는 고 1 때 이미 박민규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좋은 대본을 찾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드라마 피디의 도전은 의미있다. 열일곱에 문학도의 꿈을 접은 나, 먼 길을 돌고 돌아, 나이 마흔에 드라마 피디가 되었다.

열일곱에 나는 박민규가 부러웠다. 그가 가진 재능이 부러웠고, 내게 없는 가능성이 부러웠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깨달았다. 내가 아닌 것을 부러워할 이유 없고, 내게 없는 것을 꿈꿀 이유도 없다.

국문과를 못갔다고 문학의 꿈을 접을 이유가 없듯이, 
신방과가 아니라고 피디의 꿈을 접을 이유도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라.
내가 아닌 것을 꿈꾸지 말고, 내가 가진 소중한 재능에 집중하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한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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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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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가워요 2011.12.17 0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스트로 글을 쓰시는 모습에서 정말... 글앓이하시는구나 했더니 ^^
    누가 살리에르를 질투쟁이 할아범으로 만들었을까요?
    그 재간둥이가 누구였는지 피디님은 아시겠죠?
    전 그냥 여러 모짜르트에 관한 설 중 하나란 것 밖에... ^^
    살리에르가 얼마나 행복했었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죠.
    천재를 알아 보는 멋진 눈이라... 정말 모든 피디 지망생들이 탐내겠어요.
    녹녹하지 않은 현실에 좌절할 때 쯤이면 피디님 글이 위로가 되네요.

    습자지 같은 지식과 무식함 그리고 오류투성이 기억력의 소유자지만
    언제나 즐겁게 꿈을 향해 뛰고 있답니다~~~ ^^
    세상 꽤 만만한 거 같고 재미진 곳으로 보이게 해주셔서 늘 감사해요.
    어깨 한번 쳐졌었는데 다시 쫙 펴 봅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

  2. 김민식pd 2011.12.17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잘난 천재만 있다면 재미없어요. 박수쳐주는 관중도 있고 아껴주는 팬도 있어야죠. 물론 꿈을 꿀 수 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무대위의 삶을 꿈꾸어야죠.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니까. ^^

  3. 이강원 2011.12.17 0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PD님 말씀 읽을 때마다 한가지씩은 꼭 배워가는 것 같아요.
    오늘도 정말 마지막 부분 깊게 새겨들었습니다. 현재의 나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찾는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나에게 없는 것들을 탓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주옥같은 말씀이네요. 저도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야 사랑한다~'

  4. 윤재리 2011.12.18 0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글에는 항상 격려가 들어가있어서 너무 기분도 좋고 읽고싶어집니다. ㅋㅋ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김민식pd 2011.12.18 0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힘들었던 어린 시절, 스스로를 격려하던 버릇이 남아서... 그리구 지나보면 아무리 힘든 일도 다 추억이 되더군요. 그래서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겁니다.^^

  5. 5252 2012.05.30 0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스스로 격려하며 살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