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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박민규와 나

by 김민식pd 2011. 12. 16.
어려서 나는 자칭 문학소년이었다. 늘 책을 읽었고, 늘 글을 썼다. 백일장에 나가 시를 쓰기도 하고, 연애편지 대필도 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 문학의 길을 접고 이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시화전을 했다. 평소 글 좀 쓴다고 생각했으니, 나도 까불까불 시를 출품했다. 내 시 옆에 반 친구의 시가 나란히 걸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의 시에 가서 꽂혔다. 나는 어설프게 어른들의 시를 흉내내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시는 그냥 탁월했다. 한마디로 차원이 달랐다. '타고난 문재란 저런 거구나!' 나는 그 순간 문학도의 꿈을 접었다.

내게 좌절을 안겨준 그 친구가 바로 소설가 박민규다. 민규와 나는 울산 학성고 동창이다. 고교 졸업 후, 박민규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로 갔고, 나는 한양대 자원공학과로 진학했다. 나에게는 박민규와 같은 문학적 자질이 없으니, 그냥 평범한 엔지니어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내내 나는 글을 앓았다. 전공 공학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늘 소설만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글에 대한 짝사랑의 열정에 굴복했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해서, 좋은 글을 읽는 즐거움마저 버릴 수는 없지않은가. 그 이후 나는 매년 100권의 책을 읽는 행복한 독서광이 되었다.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옮길 수는 있지 않은가. 통역대학원을 다니며 남의 말과 글을 옮겼지만 가슴 한켠 창작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이 설흔에 피디 공채에 지원했다.

96년에는 TV PD를 공통직군으로 뽑았으니, 입사 후 드라마 피디를 지망할 수도 있었다. TV문학관이나 베스트셀러 극장같은 문학 작품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을 꿈꿀수도 있었는데, 문학을 전공하지 못했다는 나의 자격지심이 드라마 대신 예능을 택하게 했다. 하지만 예능을 하면서도 이야기에 대한 짝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들이 이십대 후반에 시작하는 드라마 연출을 나는 나이 마흔에 시작했다. 늦게 가는건 두렵지 않다. 해보고 싶은 일을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해보면 되는 것이다. 주위에서 견제와 타박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꿋꿋하게 견뎠다. 나는 고 1 때 이미 박민규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좋은 대본을 찾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드라마 피디의 도전은 의미있다. 열일곱에 문학도의 꿈을 접은 나, 먼 길을 돌고 돌아, 나이 마흔에 드라마 피디가 되었다.

열일곱에 나는 박민규가 부러웠다. 그가 가진 재능이 부러웠고, 내게 없는 가능성이 부러웠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깨달았다. 내가 아닌 것을 부러워할 이유 없고, 내게 없는 것을 꿈꿀 이유도 없다.

국문과를 못갔다고 문학의 꿈을 접을 이유가 없듯이, 
신방과가 아니라고 피디의 꿈을 접을 이유도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라.
내가 아닌 것을 꿈꾸지 말고, 내가 가진 소중한 재능에 집중하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한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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