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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새로운 사랑을 꿈꿀 때

by 김민식pd 2020. 1. 7.

(오늘은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왓챠플레이>에 올라온 영화 <롱샷>을 보고 쓴 글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 중 하나는 즉흥적으로 사는 것이다. 길게 따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시간도 소중한 자원이다. 오래 고민하는 대신, 내키면 바로 한다. 영화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을 때 바로 본다. 


지난 여름, 지나가는 버스에 영화 <롱 샷> 광고가 있었다. 샤를리즈 테론과 세스 로건이 나오는 포스터. 샤를리즈 테론은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배우인데 <매드 맥스 : 퓨리 로드>를 보고 다시금 사랑에 빠졌다. 세스 로건의 코미디는 딱 내 스타일이다. 여신 샤를리즈 테론과 찌질이 세스 로건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 로맨틱 코미디겠구나! 찾아보니 이미 극장에서 내린 후였다. 아차, 놓쳤구나. 그러다 SNS에 올라온 영화평을 보고 다시 혹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보니 왓챠플레이에 올라와 있다. 왓챠플레이 덕분에 내키면 바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왓챠플레이는 올해 내게 찾아온 최고의 선물 중 하나다.

기자 출신 백수인 ‘프레드 플라스키’(세스 로건)는 20년 만에 첫사랑 베이비시터 ‘샬롯 필드’(샤를리즈 테론)를 만난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현재 국무 장관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다. 프레드는 술과 약에 쩔어 살지만 개그감각 하나는 탁월하다. 그 덕분에 샬롯의 건조한 연설에 웃음을 보태기 위해 고용되는 프레드. 어린 시절 짝사랑하던 여신님을 가까이 서 모시는 연설보좌관이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로맨스가 꽃피기 딱 좋은 설정이다. 

나는 로맨틱 코미디 전문 연출가다. 로코와 멜로의 차이는 뭘까?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너무 사랑한다. 1회부터 죽고 못 산다. 다만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이 시한부 인생, 알고 보니 남자 주인공이 원수의 아들, 알고 보니 여주는 애 딸린 이혼녀, 알고 보니 남주는 재벌 2세 외동아들. 사랑에 빠진 남녀를 세상이 도와주지 않으니, 비극적 멜로가 탄생한다. 반면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서로 너무 싫어한다. 너무 별로인 상대와 자꾸 만나게 된다. 자꾸 엮이게 되니 주위에서 “너 혹시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냐?”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럴 때마다 펄쩍 뛰지만 왠지 마음은 흔들린다. 멜로는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를 기어코 찢어놓는 이야기고, 로코는 안 어울리는 남녀를 맺어주는 이야기다. 샤를리즈 테론과 세스 로건이 나오는 <롱 샷>은 딱 봐도 로코다. 심지어 ‘이 세상 로코가 아니다’ 남녀 주인공의 격차가 이 세상과 저 세상 만큼이나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이루어진다. 로맨틱 코미디 설정의 특징이 하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을 연출할 때, 사람들이 나보고 그랬다. ‘아니, 조인성이 박경림을 짝사랑하고, 장나라가 양동근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는 그게 진짜 사랑이라 생각한다. 

상대방이 멋지기/예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빠지는 것.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문이 필요하다. 극중에서 아름다운 자태의 샬롯을 보며 프레드가 반복하는 대사. “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 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 이걸 믿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수십만 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했다. 그런 선조들의 용기 덕분에 우리가 지금 존재한다. 심지어 수컷 공작새는 지금도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 (수컷 공작의 꼬리는 생존에는 치명적 장애물이지만 오로지 짝짓기를 위해 발달했다.)

스물아홉 살의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짝사랑하는 후배가 대학 때 방송반을 했다는 얘기에 “너는 방송사 기자나 아나운서를 해도 잘 어울릴 텐데.”하고 말했다. 환심을 사기 위해 한 말인데, 상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선배, 방송사 입사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공대를 나오고 영업사원으로 일한 나는 방송사 공채에 대해 잘 몰랐다. 문득 떠오른 생각. ‘혹시 내가 PD가 되면 나를 다시 봐줄까?’

오로지 후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대학원 공부 대신 방송사 시험 준비를 했다. 짝사랑은 자기 계발에 있어 최고의 동기부여다. 상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멋진 내가 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한다. 

2020년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새로운 한 해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바꿔줄까? 인생을 바꾸는 방법 3가지. 습관을 바꾸거나, 공간을 바꾸거나, 만나는 사람을 바꾸면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새해에는 모두 용기를 내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용기가 부족하다면, 재미난 영화 한 편 먼저 보시기를. 재미난 로맨틱 코미디 한 편을 보고, 모두 용기를 얻는 한 해가 되기를. 


2020년 새해, 여러분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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