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지겨운 일상에서 탈출이 필요할 때, <사랑의 블랙홀>

by 김민식pd 2019. 12. 11.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영화 리뷰입니다.)

필 카너즈(빌 머레이)는 뉴스 앵커가 되는 게 꿈인 기상 캐스터다. 영화의 원제는 <Groundhog day>이다. 두더지 비슷하게 생긴 마못이 집에서 나와 겨울이 언제 끝나는지 예보를 해준다. 개구리가 나오는 경칩 비슷한 날인가 보다. 어느 시골 마을 성촉절 행사를 중계하러 간 필. 두더지의 날씨 예보를 전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 대충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내린 폭설 탓에 도로가 끊긴다. “이 놈의 일기예보!”

 
촌구석을 탈출하지 못하고 하루 더 지내야한다니 짜증이 치솟는다. 마을에 돌아와 잠을 자고, 아침에 눈뜨니, 라디오에서 어제 나온 방송이 또 나온다. DJ의 농담도 똑같고, 음악도 똑같고, 심지어 “오늘은 성촉절입니다.”라는 멘트도 똑같다. “방송사고로군. 이 놈의 시골구석!” 

나가보니 어제 아침에 만난 사람이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한다. “저 양반은 건망증이 심하군.” 그런데 모든 동네 사람들이 다 그런다.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만 이상한 게 아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고 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시골에 갇힌 게 아니라, 타임 루프에 갇혔다. 같은 하루가 끝없이 반복된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톰 크루즈는 죽었다 살아나는 일을 무한반복하면서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가 된다. 이 남자도 그렇게 세상을 구하면 좋으련만, 같은 능력을 가지고 여자를 유혹해서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현금수송차를 털어 난잡한 생활을 누리는 데만 집중한다. 같은 자극도 반복되면 지겨워진다. 매일 똑같은 날이 끝없이 계속 되자 미칠 지경이다. 자동차 사고, 감전사, 투신자살 등 갖가지 방법으로 지겨운 삶을 탈출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라디오 디제이의 똑같은 멘트가 들려온다. “오늘은 성촉절입니다!” 이 놈의 무한루프에서 달아날 길은 없을까?

생각해보면 1994년 스물일곱 살의 내가 그랬다. 외판 사원으로 일하며 치과 영업을 뛰었다. 오늘은 광주, 내일은 대구, 전국의 치과를 돌아다니며 제품을 파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울상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치과 환자들 틈에서, 혼자 환하게 웃으며 간호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힘들었다. 

어느 날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내 남은 인생이 눈앞에 펼쳐졌다. 5년 후, 대리가 되면 저기 칸막이가 있는 책상, 10년 후 부장이 되면 저 앞 창가 자리, 20년 후, 임원이 되면 한 층 위 사무실, 못되면 나가서 대리점 영업. 하루하루 재미없는 어른의 일상을 반복하며 상사의 삶을 닮아가겠지. 이렇게 살다 갈 수는 없다. 뭐라도 재미난 일을 하나씩 찾아보자. 출근 전 새벽에는 수영을 배우고, 퇴근 후 저녁에는 영어 학원을 다녔다. 수영은 재능이 없었고, 영어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통역사가 되었다.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데 싫증이 난다면, 하루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본다. 그게 영화 속 주인공이 찾은 해법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뉴스 앵커를 할 수 없으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직업은 뜻대로 되지 않아도 취미는 가능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피아노 연습을 계속한 끝에 수준급 연주를 선보이게 된다. ‘이제는 내가 좀 자랑스럽다!’ 취미를 즐긴 끝에 더 멋진 내가 된다.

20대의 나에게 영웅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였다. 책을 읽고, 시간 관리의 개념을 배운 나는 하루를 나누어 다양한 활동을 즐기는 삶에 도전했다. 그 결과 통역사, 피디, 작가, 강연자라는 여러 직업을 얻었다. 취미로 시작한 영어 공부와 시트콤 시청이 훗날 통역사와 드라마 감독이라는 직업으로 이어졌다. 이제 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울 때, 새로운 취미를 시작한다. 내게 일을 주지 않는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새로운 놀이를 찾아본다.

평범한 사람도 시간을 정복하면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교훈이다. 영화 같은 삶을 꿈꾼다면, 책 한 권 소개하고 싶다. <그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해내는가?>(로버트 포즌/김영사) 모두에게 주어진 똑같은 시간을 활용해 더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생산력의 법칙이 소개되는 책이다. 영화를 보고 필이 부러우면, 책을 찾아보시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책 속에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