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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놓쳐서 미안해요

by 김민식pd 2020. 1. 13.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아, 이 영화는 거장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인사로구나.'했는데요. 은퇴를 선언한 감독이 다시 영화 한 편을 내놓습니다. <미안해요, 리키> 지난 몇 달 동안 즐겨 읽는 신문 지상을 통해 영화 소개를 읽을 때마다 궁금했어요. '이제까지 만든 영화들이 다 걸작인데, 83세에 만든 영화가 새삼 최고라니,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제가 좋아하는 아트하우스 모모에 찾아가 영화를 봤어요. 음... 전율입니다. 이렇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영화라니... 영화를 보고 와서 아내에게 그랬어요.

"<미안해요, 리키> 대박이야. 꼭 극장에 가서 봐."

"무서워서 못 보겠어."

"뭐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보면서 극장에서 펑펑 울었거든.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음... 나는 이번 영화 보면서 더 울었어. 이번 영화가 훨씬 더 슬퍼. 그런데, 꼭 봐. 정말 좋은 영화야."

극중에는 한 가족이 나옵니다. 아빠는 택배 기사에요. 건설 일용노동자로 일하다, 일감이 없어 택배를 시작합니다. 물류 회사에서 그래요. '당신은 우리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다. 당신은 개인사업자로서 우리와 계약을 하는 거다.' 택배를 하기 위해 우선 트럭을 사야합니다. 할부금을 갚기 위해 하루 14시간씩 뜁니다. 중간에 쉬면 안 돼요. 지정 시간에 택배를 마치기 위해 쉼없이 뜁니다. 아프면 안 돼요. 하루 빠지면 대체 기사의 비용을 대야 하고 벌금을 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만만치가 않아요.

엄마는 노인 돌봄 노동을 합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복지 서비스의 담당인데요. 노인 한 사람 돌보는 일당을 시간이 아니라 건으로 계산합니다. 누구 한 사람 더 친절히, 오래 돌보기 힘든 시스템인데요. 정이 많아 늘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부가 열심히 뛰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어요.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입니다. 택배 노동자가 부재중인 집 앞에 남겨두는 메모에요. <죄송합니다만, 부재중이시네요.> 그 아래에 어디에 물품을 두고 가는지 적어두죠. 저 문장은 서비스 회사다운 고객 응대 표현이라 생각해요. '물건을 배달하러 왔는데 댁에 안 계시네요.'라고 하면 마치 집에 없는 고객을 탓하는 것 같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 당신을 놓친 우리 잘못이라는 거지요. <죄송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Sorry, We Missed You> 택배기사가 남기는 메모를 켄 로치 감독은 주인공 가족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활용합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을 놓쳤네요.> (You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해석할 수 있지요.)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사회 복지 시스템에서 누락된 가난한 노동자 가족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이를 국내 개봉하며 <미안해요, 리키>라고 번역했는데요. 감독의 의도를 잘 읽은 번역이라 생각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리키에게 미안했거든요.

근면성실한 영국 백인 노동자인 리키가 더 이상 공사장 일을 따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고도성장기를 이끌어가던 건설업이 이젠 맥을 못추는 거죠. 저성장국면에 들어서며 예전같은 건설붐이 일지 않는 거죠. 게다가 고된 육체 노동을 더 싼 임금을 받고도 해주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고요. (이주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분노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 투표로 이어지죠.) 이건 리키의 잘못이 아니에요. 생존을 위해 이민을 선택한 이주노동자의 잘못도 아니에요. 건설경기 침체 탓만도 아니에요. 그 어떤 시스템도 끝없이 성장할 수는 없거든요. 즉, 리키의 실업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공사장에서 일을 할 때는 잠깐씩 쉬면서 담배도 피우고, 일이 끝나고 동료들과 술도 마셨겠지요. 이제는 달라요. 플랫폼 노동의 경우, GPS 단말기가 한 장소에 2분만 머물러도 삑삑 경고 신호를 보냅니다. 빨리 다음 배송장소로 가라는 거죠. 이제는 타인이 나를 통제하지 않아요. 나 자신이 나를 더욱 억압합니다. 한 건이라도 배송을 더 해야, 한 푼이라도 더 벌고, 그래야 가족을 먹여 살리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의 톱니바퀴가 주인공 가족을 쉼없이 조여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리키의 취업 면접으로 시작합니다. 건설 노동자로 잔뼈가 굵은 리키의 자부심 강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평생 실업수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지, 나라에 손을 벌리지는 않아요."

그 대목에서 벌써 저는 가슴이 찌릿했어요. 아,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면 모든 게 내 탓이 되는데...... 신문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가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지금 시대에서 가난한 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라서 그래요. 수천년 동안 농업의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산업의 변화는 급격합니다. 농업이 공업으로 대체되고, 공업은 이제 또 새로운 지식산업에 의해 바뀌고 있어요. 로봇과 인공지능이 점점 늘어납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어요. 수명이 늘어나고, 기계의 효율이 높아지면서 사람이 일을 하지 않아도 이윤을 창출하고 공장이 돌아가는 시대가 되고 있어요. 이런 시대에는 개인의 성실함이 별 의미가 없어요.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 신문에서 본 쪽지가 떠오릅니다. 그들도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어요. 집주인에게, 혹은 자신을 발견할 복지공무원에게. 마지막 집세를 남기고, 공과금을 남기고, 자신을 수습할 이들을 위해 봉투를 남깁니다. 그 위에는 '미안합니다'라고 씌어있지요. 

아니요. 우리가 미안합니다. Sorry, We Missed You. 당신을 놓쳐서 우리가 미안합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는 동안, 뒤처지고 빠지는 사람은 없는지 챙겼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우리가 미안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선별적 복지 제도의 문제를 짚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잔인한지 보여주지요. <미안해요, 리키>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도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사람들. 두 영화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어요.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 사람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켜줄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일 소개할 책은 <소득의 미래>입니다.

오늘 영화 이야기는 내일 책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 영화,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를 놓치면 정말 미안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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