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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찬기파랑가의 SF 버전

by 김민식pd 2020. 1. 15.
여행을 좋아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크루즈 여행도 해보고 싶어요. 이동이 불편한 노후에는 먹고 자고 한 곳에서 하며 세계를 유람하는 크루즈도 좋겠지요. 큰 배에는 의무실도 있고, 의사도 있어요. 여차하면 헬기로 실어나를 착륙장도 있고요. 만약 우주여행의 시대에도 크루즈가 있다면? 그 배에 갑자기 우주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데, 단 한 사람의 의사만이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면? 
보통 추리소설에는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가 범인일 가능성이 큰데요. 모두가 바이러스에 걸리는데 혼자 안 걸리는 사람은 의인일까요, 아니면 바로 그 바이러스의 제조자일까요?

<기파> (박해울 / 허블)  

박해울 작가는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어요. 학교 졸업 후 회사원으로 일하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글을 썼대요. 끊임없이 등용문을 두드린 결과,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합니다. <기파>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재미있어요.
대학원 수업 과제를 위해 <삼국유사>를 읽다 학창 시절에 외운 <찬기파랑가>를 만나 추억에 젖습니다. 화랑 '기파'를 찬양하는 노래인데, 실제로 그가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었을까? 하는 불온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꼭 필요해요.^^) 무조건 찬양하는 것보다는 때로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조사를 해보니, 기파가 화랑이라는 설도 있고, 부처를 치료했다고 알려진 고대 인도의 의사 '지바카'라는 설도 있대요. 화랑 기파가 어쩌면 의사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SF적 상상이 탄생합니다. 
우주크루즈 오르카호에 탑승한 의사 기파, 홀로 생존한 의인 기파를 구조하기 위해 나선 우주택배기사 충담. 그리고 아누타. 아누타는 어릴 때 사고를 당해 눈을 잃고 흉측한 기계 의안을 달고 삽니다. 그녀가 우주유람선 오르카호에 오른 건, 값비싼 생체 안구 이식 수술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하철도 999의 설정이 떠오르지요.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기겁을 합니다. 

'기계 의안 자체는 죄가 없었다. 오히려 죄를 물어야 할 건 그녀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지만 달리 어찌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차별적인 시선에 맞설 용기도, 의욕도 그녀에겐 없었다.'

(111쪽)

어려서 턱에 화상을 입어 큰 흉터가 있었어요. 나이가 들어 지금은 흉터가 거의 사라졌지만, 10대 시절에는 이게 꽤 뚜렷했던 탓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지요. 따돌림은 개미지옥이에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 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버둥거림을 보고 더 잔인해지는 아이도 있거든요. 그럴 때 제일 좋은 대응은 그냥 다른 곳으로 가는 거지요.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탈출할 수는 없으니 책 속의 세상으로 달아났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책은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아주 예전부터 인간들은 제 한 몸 편해지자고 신분을 나누고 노예를 만들었지. 그러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로봇을 부리기 시작했어. 로봇이 상용화되고 인간들이 힘든 일은 로봇이 도맡게 되자,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편한 삶을 누릴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지. (...) 하지만 변화한 것은 신분체계뿐이었어. 세밀히 나누어졌지. 맨 아래에는 로봇이 있지. 로봇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야. 로봇 다음에는 사이보그화된 인간들...' 
(149쪽)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후, 한국 사회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더욱 강해졌어요. 그러한 기술 변화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이제 SF 붐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최근 들어 한국 SF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어요. 

책 말미에 심사경위가 나오는데요.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의 이름이 반갑습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추천사를 써주신 분이지요. 

'(280편의 응모작 중에서) <기파>를 대상작으로 정하는 데에 별 이견이 없었다.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고 SF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이야기의 완성도와 구성도 무난했다. 그에 더해서 아이디어 및 그와 결합한 세계관의 수준도 돋보였다. 최근 한두 해 사이에 AI와 로봇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놀랍도록 팽창한 것을 실감하면서 다시금 안드로이드의 주제가 갖는 의미심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207쪽)

어려서 저는 SF를 좋아했어요. 현실이 힘들수록 더 멀리 달아나고 싶은 법이지요. 저 먼 외계 우주나 미래 세계로. SF를 좋아하니 번역가가 되고 싶었어요. 어려서 내가 읽은 무수한 책은 다 누군가 나를 위해 번역을 해준 작품이에요. 빚 갚는 마음에 번역을 해서 온라인 동호회에 글을 올렸어요. 95년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그렇게 모은 번역 원고를 들고 무작정 찾아갔던 분이 바로 박상준 SF 평론가입니다. 

이제는 정식 등용문이 생겼어요. 김초엽 작가 등 매년 걸출한 신인을 내놓고 있는 <한국과학문학상>, SF 작가를 꿈꾸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한국과학문학상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 <기파>
언젠가 책 표지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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