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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소속감보다는 성장이 중요하다

by 김민식pd 2019. 10. 14.
드라마 복귀작을 연출할 때 어린 조연출들과 일을 했어요. 오랜만의 연출이라 매일매일 즐거웠어요. 밥때마다 후배들과 맛집을 찾아다녔지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식당에서 신나서 떠드는 건 나혼자라는 걸. 후배들은 조용히 듣기만 하더군요.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기러기 아빠라 퇴근해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며, 굳이 늦은 밤까지 신혼의 나를 붙잡고 퇴근시키지 않던 부장님... '어려서 내가 질색하던 그 말 많은 50대 부장이 이제는 나란 말인가?'
다음부터 점심시간에는 혼자 조용히 롯데리아에 가서 책을 펼쳐놓고 데리 버거 세트를 먹었습니다. 혼밥의 성지 롯데리아에서 가성비 끝판왕은 데리 버거 런치 세트죠. 3800원! 나중에 살짝 보니, 후배들은 회의실에서 배달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수다를 떨더군요. 그래요, 부장이 없는 점심이 더 즐거운 점심인 거죠. 30대 어린 후배들과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들의 속내가 궁금하던 차에 책을 읽었어요.

'소통을 잘하는 상사와 그렇지 않은 상사를 구분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직원들과 티타임을 자주 갖는지 지켜보면 안다. 설마 티타임을 자주 가져야 소통을 잘한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혹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자며 시시때때로 부하 직원을 불러 모으는 상사일수록 남의 의견을 잘 듣지 않는다는 건 내가 깨달은 불편한 진실이다. (...)
아무리 편한 상사라도 상사는 상사다. 동료나 동기만큼 편할리 없다. (...) 며느리는 영원히 시부모의 딸이 될 수 없듯, 부하 직원은 상사와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억지로 소통하려고 하면 오히려 소통이 어긋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사람이 몰린다.'

(<그놈의 소속감> 31쪽)

<그놈의 소속감>(김응준/김영사)의 저자는 공무원인데요. 별명이 독특합니다.

'나는 '스티브'라고 불리는 4년 차 공무원이다. 스티브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일한다며 선배 사무관이 지어준 별명이다. 순종적인 태도로 회사를 다니지 않고, 회식은 가능한 한 멀리하며, 출퇴근시간을 칼같이 지켜서 그렇게 불린다. (...)
사람을 싫어하진 않지만 가능하면 일만큼은 혼자 하고 싶다. 조직은 안락함을 주는 대신 인간에 대한 냉소를 유발하는 것 같다. (...)
공무원, 지루하고 딱딱하고 수직적이고 폐쇄적일 것만 같은 직업. 일처리 방식도 비효율적이라 답답해 보이지만 직접 겪어보니 더 심각했다. (웃음)'

(5쪽)

저도 첫 직장에서 별명이 아메리칸 스타일이었어요. 미국계 회사니까, 아메리칸 스타일이면 칭찬인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칼같이 퇴근하고 영어 학원에 달려가는 제가 상사에게는 눈엣가시였어요. 제게는 일과 삶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어려서 내가 속한 조직(가정, 학교, 직장)과 불화가 심했어요. 그래서 한때 프리랜서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어쩌다 MBC라는 좋은 직장을 만난 덕에 20년 근속을 넘긴 부장님이 되어버렸네요. 자유롭고 수평적인 방송사 문화 덕분에 늘 즐겁게 일했어요. 만약 내가 들어간 조직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를테면 공무원 조직? <그놈의 소속감>은 젊은 공무원이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관료 조직에서 슬기롭게 생존하는 법'에 대해 쓴 책이에요.

'처음 직장에 들어와 놀란 게 있다. 
"소속감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면 소속감이란 게 으레 생길 거라 믿는 어른들이 너무 많아서다. 아무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시간이 가급적 빨리 끝날 수 있도록 표정은 자연스럽게, 고개는 가끔 격하게 끄덕이기 등이 있다.'

그놈의 소속감은 누가 가지라고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에요. 충성과 효도라는 개념이 그렇지 않나요? 살인마 독재자에게 충성하고,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효도하는 건 아니잖아요? 소속감을 가지라고 후배에게 잔소리할 시간에, '나는 좋은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상사인가?'를 자문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은 후, 후배들에게 점심 먹자고 먼저 연락하지 않아요. 후배가 부르면 그때 나갑니다. 586 선배들에게 실망했다는 후배를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선배들에게 희망을 찾지마라. 길은 스스로 찾는 거다. 고도성장기를 살아온 선배의 성공 노하우는 저성장 시대에는 용도폐기 대상이다.'라고요.

저자는 직장 생활을 하다 힘들 때 글쓰기로 위로를 찾아요. 물론 글쓰기에도 태클은 있지요. 책 쓰는 공무원이라니까, 여기저기서 훈계나 충고를 하나봐요. '너, 요즘 일은 안 하고, SNS만 한다며?' 어디나 이런 양반은 있군요. 소통의 시대입니다. 퇴근 후, 자유시간 쪼개어 SNS하는 건, 퍼스널 브랜딩이고요. 후배의 퇴사 후, 노후까지 책임질 게 아니라면, 개인의 자기계발에 대해 뭐라 그러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어떻게 책까지 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씩 글을 쓰고 출근합니다"와 같은 유의 초인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아 답하기 조심스러워진다. "퇴근하고 최대한 다른 일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답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가능한 한 벌이지 않고 불필요한 외출도 자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속적으로 글을 생산하는 비결이다. 집에서 빈둥대다 보면 어느샌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게 된다. 때로는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않는 편이 중요한 일을 해내는 최선의 방법임을 새삼 깨닫는다.'

(61쪽)

저도 저녁 약속을 잡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에너지를 쓰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 (독서, 영화, 여행, 글쓰기, 유튜브)에 온전히 시간을 내어줍니다. 살아보니 제가 다 잘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은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조직에 대한 소속감보다는 개인의 성장이 더 중요합니다. 소속감은 개뿔, 나한테 잘 하기도 벅찬 인생인데.

'글을 쓰는 동안 찾은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방에 앉아 탐험하듯 책을 읽으며 창의적으로 글을 생산해내는 시간에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의 간섭도 없고 누군가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기쁨이 있다.'

(263쪽)


직장인의 글쓰기가 궁금하다면, 아니면 직장 초년생의 푸념을 함께 나누고 싶다면 이 책, 추천합니다. 글 쓰는 재미를 알아버린 4년차 공무원 덕분에 입사 4년차 후배들의 생각을 알게 되었어요.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아마 글을 쓰는 저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썼기 때문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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