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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나는 오늘 무엇을 얻었을까?

by 김민식pd 2019. 10. 4.

김금희 작가님의 단편집을 읽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김금희 짧은 소설 /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책을 펼쳐드는 순간, 첫 이야기부터 빠져들었어요.

'윤경은 눈을 뜨자마자 산술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대학 가서 가장 좋았던 것으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과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꼽을 정도였는데, 산술이라는 너무나 산술적인 단어가 대체 머릿속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가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경은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공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소중한 똥 덩이를 가뿐한 여섯 개의 다리로 굴리는 소똥구리처럼.'
(17쪽)
 
첫 문단이 참 매력적입니다. 저도 수학이 젬병이고, 대학 가서 좋았던 건 연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생각해보니, 공대를 가는 바람에 심지어 어려운 공업수학을 공부하고, 그렇다고 연애를 하지도 못했으니... 고등학교 다닐 때는 입시를 앞두고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하니, 연애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위로라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 몇 번 사귄 친구들에게 세게 차인 후, 산술적으로 너무 손해같았어요. 처음부터 마음을 준 것도 나, 마지막까지 비굴하게 매달린 것도 나, 만나는 기간 내내 눈치보며 굽실거린 것도 나... 연애는 기본적으로 밑지는 장사 아닌가 싶었는데요. 나중에 <논스톱> 만들면서 소심한 복수를 합니다. 조인성이 박경림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장나라가 양동근을 짝사랑하는 이야기를 찍으면서요... (세상에, 잘 난 것들, 다 복수할 거야!) ^^

<규카쓰를 먹을래>라는 단편에 보면 희영, 소영, 한영이라는 대학 동아리 친구 3인방이 나옵니다. 이름이 '영'자로 끝난다고 '영 자매'로 통하는데요. 서로 비슷한 점은 없어요. 

'술자리만 해도 희영은 어디든 가서 만취하고 싶어 했지만 한영은 '적당히'가 좋았고 소영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희영이 좋아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셋 다 가서 앉아 있곤 했는데, 한영과 소영은 특히 이런 순간이 오는 것을 경계했다.'

(28쪽) 

만취하고 싶어하는 희영은 술취한 사람의 상처에 쉽게 마음을 열고 연애를 시작해버려요. 소영은 그런 희영을 보며 '고독과 허무의 제스처에 익숙한 인간들이란 결국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살뜰히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하죠. 희영과 소영이 연애 문제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면 한영이 나서지요. 
"정작 나쁜 놈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까지 의 상하지는 말자."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희영은 번번이 떨어지지만 꾸준히 임용고시를 준비하고요. 소영은 어느 영세한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한영은 강사로 대학을 전전해요. 어느날 소영이 희영에게 그럽니다.

"너는 가끔 잊는 것 같아. 너가 되게 운이 좋은 아이라는 것."
"내가 뭐가 운이 좋니? 운이 좋으면 이렇게 몇 년을 임용고시를 못 붙겠어?"
"그러니까 그 못 붙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거야."

(위의 책 33쪽)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도 그렇고, <너무 한낮의 연애>도 그렇고, 김금희 작가님의 소설집, 참 좋아요. 짧은 이야기를 읽다 문득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놓치고 지나왔던 걸 생각합니다. 뒤늦게 인생의 정산을 해보기도 해요.

이렇게 매일 책을 읽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책을 읽을 물리적 시간이 있고, 정신적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냅니다. 공짜로 즐겼으니, 뭐라도 갚아야한다는 마음에 책에서 읽은 구절을 블로그에 옮겨 적어봅니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벌고 무엇을 얻었을까, 소소한 정산을 해보는 하루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만 읽어도 좋은데 무엇을 더 바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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