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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간만에 연애소설

by 김민식pd 2019. 9. 23.
어려서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 실제 경험치는 턱없이 부족하니, 상상의 나래를 펴며 사랑을 꿈꿨지요. 오랜만에 연애 소설 한 권을 읽었어요.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 정지현 / 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원작소설이 궁금해 찾아봤어요. 학자 아버지를 둔 사춘기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는 여름마다 원고 작업을 하는 젊은 학자들에게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작업을 도와줍니다. 그들은 시골 저택에서 여름 한 달 머물며 아침에는 산책을 하고, 원고 작업을 한 후, 수영장 옆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어요. 자신의 원고를 읽던 젊은 학자가 주인집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것 좀 들어 봐." 가끔 그는 이어폰을 빼고 찌는 듯 더운 긴긴 여름 오전의 숨 막히는 침묵을 깼다. "이 헛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그는 자신이 몇 달 전에 쓴 믿을 수 없는 글을 큰 소리로 읽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아냐."
"쓸 당시엔 말이 됐나 보죠."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따져 보는 것처럼 잠깐 생각에 잠겼다. "몇 달 만에 들어 본 가장 친절한 말이군."
(38쪽)

책을 쓸 때, 제가 이래요. 블로그에서 몇 년전에 쓴 원고를 찾아내 다듬다가 문득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후진 글을 블로그에 올렸단 말인가? 이걸 확 지워버려?' 싶지요. 그럴 때, 다시 나를 달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도 있어야지. 나는 이보다는 잘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글도 있어야지.'하고요. ^^ 예전에 쓴 글을 보며 부끄러울 때마다, '아, 그래도 지난 몇 년 간 내가 성장했나보다. 그래서 이제야 허물이 눈에 들어오나보다.'라고 애써 위로합니다.

열 여덟 살 소년 엘리오는 스물 다섯 젊은 교수 올리버에게 반해버립니다. 혼자 사랑의 열병을 끙끙 앓습니다. 무심코 스치는 손길에도 불에 댄 듯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책을 읽다보면, 나 자신 사춘기로 돌아간 것 같아요.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여기는 내 공간이에요. 나만의 공간. 책을 읽으러 와요. 여기서 몇 권이나 읽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넌 혼자 있는 게 좋아?"
"아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난 그걸 견디는 법을 배웠죠."'

(95쪽)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이마를 칩니다. 아, 그렇구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한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 나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 두 남자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사랑의 손길, 아니 발길을 나눕니다. 점심을 먹으며 식탁 아래로 두 남자의 발은 서로 엉키며 장난을 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소년의 발등을 발로 어루만지자 '까무러칠 정도의 황홀함'을 느껴요. 

'디저트 접시를 보니 라즈베리 소스를 흩뿌린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붉은색 소스를 평상시보다 많이 뿌리는가 싶었는데 그 소스가 내 머리 위쪽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 같더니 사실은 내 코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기겁하면서 냅킨으로 코를 막고 머리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105쪽)

어렸을 때, 짝사랑하던 아내를 학교 휴게실 멀리서 훔쳐볼 때 그랬어요. 어쩌다 아내가 웃음을 터뜨리면 갑자기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 코피가 터질 것 같은 흥분... 책에는 이런 대사도 나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145쪽)

맞아요. 어려서 독서에 빠지게 된 이유에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선망하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꿈꾸니까 책을 읽지요. 어려서는 나의 삶이, 내가,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 들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아껴주게 되었어요. 이제는 감히 나의 삶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어요. 책을 읽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선망하는 일이고요, 글을 쓰는 건 내 삶을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73쪽에 나오는 아버지의 대사는 몇번이고 곱씹어 봅니다. 소설 결말에 해당하는 이야기라 스포일러가 될까봐 옮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배우고싶은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가 좋았다면, 원작 소설도 추천해드립니다. 
영화도 좋지만, 이건 영화보다 책이 더 좋은 경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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