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 실제 경험치는 턱없이 부족하니, 상상의 나래를 펴며 사랑을 꿈꿨지요. 오랜만에 연애 소설 한 권을 읽었어요.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 정지현 / 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원작소설이 궁금해 찾아봤어요. 학자 아버지를 둔 사춘기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는 여름마다 원고 작업을 하는 젊은 학자들에게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작업을 도와줍니다. 그들은 시골 저택에서 여름 한 달 머물며 아침에는 산책을 하고, 원고 작업을 한 후, 수영장 옆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어요. 자신의 원고를 읽던 젊은 학자가 주인집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것 좀 들어 봐." 가끔 그는 이어폰을 빼고 찌는 듯 더운 긴긴 여름 오전의 숨 막히는 침묵을 깼다. "이 헛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그는 자신이 몇 달 전에 쓴 믿을 수 없는 글을 큰 소리로 읽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아냐."
"쓸 당시엔 말이 됐나 보죠."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따져 보는 것처럼 잠깐 생각에 잠겼다. "몇 달 만에 들어 본 가장 친절한 말이군."
(38쪽)

책을 쓸 때, 제가 이래요. 블로그에서 몇 년전에 쓴 원고를 찾아내 다듬다가 문득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후진 글을 블로그에 올렸단 말인가? 이걸 확 지워버려?' 싶지요. 그럴 때, 다시 나를 달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도 있어야지. 나는 이보다는 잘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글도 있어야지.'하고요. ^^ 예전에 쓴 글을 보며 부끄러울 때마다, '아, 그래도 지난 몇 년 간 내가 성장했나보다. 그래서 이제야 허물이 눈에 들어오나보다.'라고 애써 위로합니다.

열 여덟 살 소년 엘리오는 스물 다섯 젊은 교수 올리버에게 반해버립니다. 혼자 사랑의 열병을 끙끙 앓습니다. 무심코 스치는 손길에도 불에 댄 듯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책을 읽다보면, 나 자신 사춘기로 돌아간 것 같아요.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여기는 내 공간이에요. 나만의 공간. 책을 읽으러 와요. 여기서 몇 권이나 읽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넌 혼자 있는 게 좋아?"
"아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난 그걸 견디는 법을 배웠죠."'

(95쪽)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이마를 칩니다. 아, 그렇구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한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 나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 두 남자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사랑의 손길, 아니 발길을 나눕니다. 점심을 먹으며 식탁 아래로 두 남자의 발은 서로 엉키며 장난을 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소년의 발등을 발로 어루만지자 '까무러칠 정도의 황홀함'을 느껴요. 

'디저트 접시를 보니 라즈베리 소스를 흩뿌린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붉은색 소스를 평상시보다 많이 뿌리는가 싶었는데 그 소스가 내 머리 위쪽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 같더니 사실은 내 코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기겁하면서 냅킨으로 코를 막고 머리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105쪽)

어렸을 때, 짝사랑하던 아내를 학교 휴게실 멀리서 훔쳐볼 때 그랬어요. 어쩌다 아내가 웃음을 터뜨리면 갑자기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 코피가 터질 것 같은 흥분... 책에는 이런 대사도 나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145쪽)

맞아요. 어려서 독서에 빠지게 된 이유에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선망하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꿈꾸니까 책을 읽지요. 어려서는 나의 삶이, 내가,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 들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아껴주게 되었어요. 이제는 감히 나의 삶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어요. 책을 읽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선망하는 일이고요, 글을 쓰는 건 내 삶을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73쪽에 나오는 아버지의 대사는 몇번이고 곱씹어 봅니다. 소설 결말에 해당하는 이야기라 스포일러가 될까봐 옮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배우고싶은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가 좋았다면, 원작 소설도 추천해드립니다. 
영화도 좋지만, 이건 영화보다 책이 더 좋은 경우거든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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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짱 2019.09.23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아리아리!

    피디님의 폭 넓은 독서가 빛을 발합니다.
    오늘도 어록이 풍성합니다.

    '나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는게 제일 중요합니다.'
    '책을 읽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선망하는 일이고요.
    글을 쓰는 건 내 삶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내 삶을 사랑하기이다.
    오늘도 나를 사랑하기 Go Go! ^---^

  2. 가리봉맨 2019.09.23 0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아침입니다~ PD님만큼이나 블로그를 열심히 하시는 영화평론가 이동진님이 강력 추천한 영화라 얼마 전에 찾아봤는데요. 여유로운 이탈리아 시골 배경과 잔잔한 스토리가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딱 제 스타일이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원작 소설도 찾아서 읽었습니다. 이어서 영어 원서도 구매해서 띄엄띄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재밌게 본 영화와 소설을 PD님도 재밌게 보셨다니 너무 반갑네요^^

  3. 섭섭이짱 2019.09.23 0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아카데미상 4관왕 소식듣고 바로 영화부터 봤었는데 ^^
    전 영화로 본 내용을 다시 책으로 읽으려면
    집중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나, 이번에는 연애고수 피디님이
    원작을 적극 추천해주시니
    원작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성격이 급해서라아아아...
    책 보자마자 273 페이지부터
    먼저 손이 갈거 같은 느낌이 드네요 ㅋㅋㅋ

    이번 책도 읽을 책 목록에 저장~~~~~~~

  4. 꿈트리숲 2019.09.23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서점가서 책 찾으면 273쪽 먼저
    펼칠 것 같은데요.ㅎㅎㅎ
    아버지가 뭐라고 했을까... 심히
    궁금합니다.

    열여덟살 소년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상대가 여자라고 생각하고 읽어내려 갔는데...
    반전이에요.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몹시 궁금합니다.

    똑같은 상황이 아니더래도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오늘 서점가서 꼭 찾아봐야겠어요.~~

  5. 아솔 2019.09.23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제 글이 세상에 나가는 게 아직은 두려워서 블로그를 꽁꽁 숨겨놓고 있어요.
    그런데 피디님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용기가 생기네요.
    이렇게 쓰는 사람도 글을 올린다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는 줄 수 있는 글이 될테니
    뭐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긴 하겠군요ㅎㅎ
    책 추천 감사합니다~

  6. GOODPOST 2019.09.23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를 서정적, 새로운 시각으로 잘 보았습니다.
    근데,,영화보다 책이 더 좋은 경우라니,
    당장 구해서 읽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가을!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며 여린 사랑의 감정을 책으로 느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 샘이깊은물 2019.09.23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콜미바이유어네임. 제목도 어쩜 이렇게 저릿저릿한지. 주인공의 애절함에 폭 빠져들었던, 진-한 여름의 맛이 뭉근한 여운으로 남았던 영화예요. 한 여름밤의 꿈이랄까요.
    끝부분에 나오는 아버지 대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적어두었어요. 기억하고 싶었어요. 터져 나오고 펼쳐지는 아이의 우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머니가 말없이 아들을 태우고 운전하시던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그러고 보니 원작 소설에서는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하네요!

  8. 마음의 평화 2019.09.23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보다 책이 더 좋은 경우가 있는거 같습니다. 얼마전에 소설 "마션"을 읽고 영화 "마션"을 봤는데요. 영화 마션이 좀 지루하더라구요. 책에서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고생스럽고 힘든게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영화는 시간의 제약이 있고 설명하는 것도 제약이 있다보니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싱거운 느낌이었어요. 소개해주신 책의 영화도 보고 싶은 영화라스트 중 하나에 올라있습니다. 인용해주신 문장 하나하나를 읽다보니 .. 이건 책으로 읽는게 더 낫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더 많이 표현되고 소설은 문장으로 표현될텐데, 문장으로 표현된 것을 읽고 느끼고 상상하는것이 더 생생하게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요~

  9. 모과 2019.09.23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방식의 서평을 읽는 것 같아요. 서평에 대한 저의 고정관념이 순간 사라지는 아침입니다. 저도 저의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와 제가 경험한 책과 영화, 여행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피디님: )

  10. 팬입니다 2019.09.23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요즘 저도 기름기없는 푸석푸석한 파마풀린 머리칼을 쥐어뜯고있습니다.
    지역사회의 여성문학회 활동을 하는데요
    1년에 한권씩 회원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내는데 올해는
    내가 본 죽음 이라는 수필을 쓰고있는데 제 개인적인 가정사와 주변인이야기라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글이라는게 저 자신을 다 보여주는거라서 힘들고 그렇습니다!
    그런면에서 매일매일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써 풀어내시는 작가 김민식님은 대단하세요^^

  11. 보리랑 2019.09.23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자와 여자, 언어가 다르듯, 사랑할 때 느끼는 것도 다르겠죠~^^ 영화 소설에 너무 몰입해서 잘 안보는 편인데, 이제는 비소설과 1:1로 읽어볼까 합니다. 책과 나, 남이 아는 나와 진짜 나의 간격이 줄어가니 행복합니다~

  12. 새벽부터 횡설수설 2019.09.23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고 싶은데 정보가 거의 없네요.
    안드레 애치먼이란 작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알고 계신분 있으실까요? 댓글 좀 부탁드려요^^
    책 추천 감사합니다!

  13. 앨리스 2019.09.23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배민 아카테미에서 피디님 강연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블로그를 찾았는데, 네이버가 아니였네요. ㅎㅎ
    이렇게 사고가 막혀서~^^
    자주 방문 할께요.

  14. 2019.09.23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조이의꿈 2019.09.23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에요ㅜㅜ 풍경이랑 분위기등등 모두 행복해지는 영화죠!! 책도 꼭 읽어보고싶네요 ㅎㅎ 글구 김민식 피디님!! 예전에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 그거 읽고 진짜 좋은 책이어서 전 원래 책을 도서관에서만 빌리는데 너무 좋아서 샀거든요..! 그리구 다른책들도 읽었는데 아직도 실천을 못했어요.. 요새 피디님 꼬꼬독이랑 세바시 등 영상들 보니까 진짜 대단하시구 너무 닮고싶은 롤모델이에요. 앞으로 자주 오겠습니다ㅏ 피디님 책 내용 다 실천하고 멋진 사람이돼서 피디님 꼭 뵙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16. 정칠 2019.09.23 2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피를 위해 책을 읽는다면 성공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왜 있는건지요?

  17. 오달자 2019.09.24 0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쓰는 건 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피디님께서 나이가 들수록 본인을 사랑하게됨으로써 지금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으시는거 아닌가요...ㅎㅎ

    책읽기와 글쓰기는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행위~~^^
    이 또한 아름다운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18. 크리둥이 2019.09.24 0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읽기가 현재 지금의 나로 부터 도망 갈수있는 일 중에 하나였다는걸 피디님의 글에서 저 스스로 또 한번 알게되었습니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거 어느 누구와의 관계보다 중요 하다는 걸 또 한번 느끼고 느꼈습니다
    매일 아침 피디님의 글 읽기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연히 알게 된 이 블러그가 제 아침을 여는 시작이네요
    항상 마음으로 응원하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 자신에게도 따듯한 격려로 시작 할께요~ 나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나는 잘 하고 있고 잘 견뎌낼 수 있으니까 조금만 힘내자~~♡♡ 사랑해